서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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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정조7)~1838년(헌종4).

자 약선(若先), 호는 귀천(龜川). 간동(榦東)의 아들. 진사시에 입격하였음.

공은 경학(經學)과 문장이 유림의 사표가 될 정도로 조예가 깊었음. 특히 삼남(三南)의 유생들이 을사명현(乙巳名賢)인 무위재(無爲齋) 강백진(康伯珍)의 시호(諡號)를 청하려고 하였을 때에, 공을 소수(疏首)로 추대하기도 하였음.

소수서원에서 유생들을 모아놓고 고과(考課)할 때에, 서승렬(徐承烈)이 향시관(鄕試官)으로 참여하였고, 공도 서간발(徐榦發)・황연한(黃淵漢)・김휘덕(金輝德)과 함께 답안을 고점(考點)하고 방(榜)을 내는 일에 참여하였음. 또한 1828년(순조28)에는 이태순(李泰淳)・이병운(李秉運)・이가순(李家淳)・황수한(黃秀漢)・서간발(徐榦發)・김낙주(金樂周)・류정문(柳鼎文)・서동열(徐東烈) 등과 함께, 옛날 퇴계(退溪)가 소백산을 유람하던 때와 꼭 같은 시기에 소백산에 올라, 여러 사람들과 연구시(聯句詩)를 짓고 아울러 이때 기록된 유람록의 발문(跋文)을 작성하기도 하였음. 또 한편으로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을 현양하는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음.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는 「輓徐進士若先成烈」에서 “문장이 호방하기는 예부터 이러하였거니와, 그대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명성은 더욱 뛰어났네.[文章落拓古如此, 君不出世名愈奇]”라고 하였음.

유집이 있음. 이중철(李中轍)이 행장(行狀)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