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 고청(孤靑) 서기(徐起)
공(公)은 조선시대 학자로서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孤靑) · 고청초로(孤靑樵老) 등으로 불리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중종 18년(1523) 귀령(龜齡)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공의 나이 7세에 서당에 나가 공부를 시작했는데 금세 통달해 버리고, 어느 날 스승에게 글을 올려 "스승님은 제 말을 허물하지 마시고 저로 하여금 성현서(聖賢書)를 읽게 해 주소서." 하였다. 스승은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치면서 비범한 아이임을 깨달았다. 10세가 되면서 화담(花潭)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이론과 기술까지 통달하였다. 공의 나이 20세가 넘어 토정(土亭) 이지함(李之涵) 선생을 만나 오도(悟道)의 바른 것을 배우면서 특히 스승과 뜻이 맞아 스승과 함께 한라산 등 각지를 유람하면서 민속과 실용적 학문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후 공은 토정과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3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으나, 고향 풍속이 어지럽고 법도가 혼란함을 늘 탄식하였다. 이후 고향에 강신서당(講信書堂)을 지었는데, 마을의 못된 자들이 그 집에다 불을 지르므로 처자를 데리고 지리산 홍운동(紅雲洞)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인적이 없는 곳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연명하고, 여름과 가을에는 산배<山梨> 등 열매로 배고픔을 달래면서 학문에 탐구하였는데, 각처에서 제자들이 몰려와 그 옆에다 서당과 숙소를 지었다. 문하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오물이 쌓이고 흘러내려 부근에 있는 절이 폐할까 염려한 공은 지리산에 기거한지 4년만에 다시 계룡산 고청봉(孤靑峰) 아래 공암동(孔巖洞)에 자리를 옮겨 이후 18년 동안 오로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공이 69세로 별세하니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공주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