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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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사릉참봉, 의령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호는 운고(雲皐).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6대손으로서, 아버지 서격수(徐格修)와 어머니 안씨(安氏)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숙부 서옥수(徐沃修)의 양자로 들어갔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26년(순조 26) 한 때 과거 공부에 뜻을 두기도 했으나 이후 포기하였는데 이는 교분을 나누었던 익종(翼宗: 孝明世子)의 죽음(1830년)이 결정적 원인이 된 듯하다.

익종은 1827∼1830년간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의 벌열(閥閱) 세력을 견제하고자 새로운 정치세력의 결집을 꾀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서유영의 친구인 박규수(朴珪壽)도 익종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이후 칩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1860년대에 비로소 관계에 진출하고 있어, 서유영과 같은 궤적을 보이고 있다.

1830∼1860년은 문학 활동기로서, 서유영은 남사(南社)·강사(江社)·죽사(竹社)·난사(蘭社)·낙사(洛社)·낙산시사(駱山詩社) 등의 시모임을 결성해 경기도 양주와 한성지역의 유수한 문인들과 문학적 교유를 확대해 가며, 다양한 양식을 수용하여 문학세계를 심화시켜 간다.

1860∼1868년은 벼슬을 하던 기간으로서, 1860년(철종 11)에 조상의 덕으로 사릉참봉(思陵參奉)을 제수받고, 1865년(고종 2) 가을에 경상도 의령현감(宜寧縣監)에 부임한다.

그러나 4년만에 파직되어 유배를 가게 된다. 이 시기에도 꾸준히 문학적 교유와 창작활동을 지속하는데, 특히 1863년(철종 14) 12월에 소설 「육미당기(六美堂記)」를 창작한다. 의령현감에 부임하고서는 청백한 자세로서 수령의 직무를 다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암행어사에게 무고(誣告)를 입어 유배된다.

1868년(고종 5) 이후는 유배 및 은둔기로서, 1868년(고종 5) 가을 평안도 삼등(三登)에 유배되었다가 1870년(고종 7) 1월에 유배가 풀리어 양주로 돌아온다. 고향인 충청도 금계(錦溪: 지금의 錦山)로 낙향하여 생활하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친다.

금계에 낙향해 있던 1873년에(고종 10) 야담집 『금계필담(錦溪筆談)』을 저술한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금계필담』의 저작일이 1873년 12월 23일로 되어 있음으로 보아 사망한 해는 1874년(고종 11) 이후 오래지 않은 시기가 될 듯하다.

서유영의 가문적 배경은 조선 후기에 관료를 대거 배출한 달성서씨의 문벌(門閥)이었지만, 그는 평생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와 사회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를 면치 못했다. 그것은 세속적 타협을 거부하는 꼿꼿하고 자유분방하며 호방한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사상적으로 그는 유학사상에 기초하고 있지만, 조선 후기에 고착화되어 사회에 악을 끼치게 되는 주자주의(朱子主義)로부터는 철저히 벗어나려는 태도를 지녀, 실학(實學)·도선(道仙)·불교에 두루 관심을 가지는 반중세적 성향을 띤다.

그의 문학은 다양한 체험과 사상적 모색의 토대 위에서 다채로운 양상을 띠었는데, 특히 서사적 성향이 강하였다. 전·야담·소설 등 조선 후기의 서사양식을 두루 수용한 것은 물론이고, 시에 있어서도 장편 고시를 선호했다.

또한 우리 역사와 풍속을 연작시로 읊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경향을 이룬 해동악부(海東樂府)와 죽지사(竹枝詞) 창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시집 『운고시선(雲皐詩選)』, 야담집 『금계필담(錦溪筆談)』, 장편한문소설 『육미당기(六美堂記)』가 남아 있다. 문고(文稿)를 엮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소실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