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계왕
목차
개요
>“대방은 우리 장인의 나라이다. 그 요청을 돕지 않을 수 없다.” >“帶方, 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 >대방의 구원 요청을 받은 후 남긴 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발췌
백제의 제9대 국왕이자 건길지. 고이왕의 아들이며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생애
286년(책계왕 1), 허물어진 위례성을 수리했다. 이후 고구려의 서천왕이 대방군을 공격할 때 책계왕은 대방군 태수의 딸 보과를 아내로 삼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방태수는 사위인 그에게 구원군을 요청했고, 책계왕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맞붙은 첫 번째 기록으로 책계왕의 대방군 구원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졌다. 책계왕 이전까지 백제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분할되어 나온 나라였으므로 동류 의식이 있어서 직접 충돌은 자제해 왔는데 중국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예맥-한인(韓人)의 혼합계열 국가인 백제와 예맥계 국가인 고구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직접 충돌할 사안도 별로 없었다. 책계왕이 죽고 17년 후인 315년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맞대게 되자 양국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했는데 어쩌면 책계왕의 이 사건은 17년 후 고구려와 백제 관계의 프로토타입일 수 있다.
287년(책계왕 2년), 음력 1월에 동명묘에 참배했다. 책계왕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 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책계왕- 대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해 <고구려본기> -서천왕- 대에는 기록이 없다. 그 해는 서천왕 17년으로 고일우와 고소발이 모반하였으므로 그런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역사학자 이병도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이 개재(介在)하였으므로 이는 불가능하다"고 했고 "미천왕 15년에 대방군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 비류왕 11년의 일이 옳은 이치"라 보았다. 그 외에 타국의 군사를 고구려의 군사로 착각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근데 사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조'를 보면 강원도 지역의 동예가 늦어도 3세기 중반에 고구려에게 복속되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에 따르면 똑같이 2세기 중반인 동천왕 시대에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는 기록이 나오므로 아마 고구려에게 복속된 강원도 지역을 통해 백제와의 접촉이 있었을 수 있다. 애초에 낙랑이 막아서 고구려와 백제가 접촉을 못하고 있었다면 백제와 똑같이 남쪽에 있는 대방이나 신라는 어떻게 침공했겠는가.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薨 >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298년 한군(漢軍 :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책계왕 본인이 친히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살해당했다. 위의 기록에서 한군은 당시 중국의 서진 제국을 말하는데 중앙 정부 차원에서 백제를 침공했다기보다는 낙랑군 태수의 판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맥인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단어로 많이 쓰였지만 이 시대 한사군이 고구려를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예로 해석하는 편이다.
기타
* 가뜩이나 기록이 적은 백제의 왕들 중에서도 특히 기록이 적은 왕들 중 한명이다. 재위 기간이 13년이나 되지만 기록이 대단히 짧다. 특히 287년 동명묘 참배 이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록이 빠져 있다. 또한 책계왕이 대방태수의 딸인 보과와 언제 결혼했는지조차도 불명이다. 대방태수의 딸과 결혼한 것은 고이왕 대에 낙랑군을 공격했던 것 때문에[* 낙랑태수 유무가 침략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자 고이왕은 잡아왔던 낙랑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대방태수와 정략결혼하여 화근을 덜어보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중국 한사군인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왜 사이가 나쁜지는 당시 중국이 삼국시대 혼란기에 조위도 내리막을 걷던 시절이라 변방의 군현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문제는 책계왕 재위 후반부쯤 되면 중국에서 삼국시대가 끝나고 서진이 등장해 이후 한사군 세력이 다시 부활해 반격을 시작한다는 점인데 책계왕이 목숨을 잃은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추정된다.
* 풍납토성의 최초 개축 시점이 책계왕의 재위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고고학적 분석이 있다. 분석 과학 제25권 제5호 2012.10 《OSL 연대 측정을 통한 풍납토성 축조 연대 산출이란 자료》는 풍납토성의 축조 연대 편년을 위해 각 토기 시료의 OSL 연대와 고고학적 맥락, 14C 연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풍납토성의 초축 시점을 294 ± 52 yrs AD (1σ SE), 제 III 단계 증축을 328 ± 30 yrs AD (1σ SE), 최종 성벽의 완성을 400 ± 76 yrs AD (1σ SE)로 비정한 바 있다. 294년이라는 연대에서 오차가 앞뒤 52년이니 고이왕 대에 개축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후 임금 대[* 최대 하한으로 미뤄보면 근초고왕 재위 초반까지 내려가기는 한다.]에서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문헌 자료와 비교해볼 때 적어도 고이왕 대에 고대 국가의 모습이 갖춰져 풍납토성이 개축되었거나 고이왕 대에 개축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책계왕 때에는 개축이 완료되었을 개연성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
[include(틀:삼국사기)] [<책계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책계왕이 즉위하다 一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다 一年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十三年秋九月 책계왕이 죽다
재위 13년인데 기록이 고작 5줄이다. 심지어 재위 3년차부터는 사망 기사 전까지 기록이 전무하다.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모든 역사서를 뒤져봐도 책계왕의 기록은 저게 전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