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
개요
부여의 국왕이자, 전연과 후연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부여계 유민. 전진의 멸망에 기여했으며, 오호십육국시대 두 나라(전연, 전진)의 몰락을 모두 본 인물이기도 하다.
성이 부씨이고 이름이 여울인 게 아니라 성이 부여씨이고 이름은 울이다. 여씨는 2글자 성을 중국식으로 축약한 것. 부여의 왕손임에도 백제 왕가인 부여씨와 성씨가 같아 백제의 방계 왕족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또한, 울(蔚)을 위(尉)의 오기로 보아 이름이 아닌 누군가의 2세임을 표시하려고 했다는 해석도 있다.
생애
부여의 현왕과의 관계는 확실치 않으나, 부여울이 '옛 부여왕(故扶餘王)'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 다만 그가 부여에서 현왕과 같이 끌려온 것인지 모용황의 딸과 결혼해 낳은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370년, 부견의 대군이 전연의 수도 업성을 포위하자 당시 산기시랑이던 그는 고구려 및 상당의 인질 5백여명과 함께 업성 북문을 열어 전진의 군대를 맞이하면서 전연 멸망에 큰 기여를 한다. 이후 전진에 정착하여 지내고 있었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으로 패배하고 모용수가 다음 해 후연을 건국하자, 부여울은 모용수에게 붙어 형양 태수의 관직을 받는다. 그는 창려 일대에서 영향력이 컸는지, 창려 일대의 선비족과 여러 부락이 모용수에게 귀순했다. 더불어 모용수는 동년 정월에 그를 정동장군, 통부좌사마, 부여왕으로 삼았다.[* 여기서 '부여왕'이라는 칭호는 부여 지역의 제후로 삼은 게 아니라 그냥 명예직이다. 기록에서 부여울이 주로 활동했던 하북성 지역은 부여의 중심지인 녹산 및 부여성이 있던 눙안 지역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군사를 관할하는 통부좌사마의 관직에 임용된 걸 보면 자체 동원 가능한 군사력도 어느 정도 있던 모양이다.
392년, 우광록대부 벼슬에 있다가 좌복야로 승진하고, 396년에는 태부까지 되지만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다. 다만 태부가 죽은 사람들에게도 내려지는 것을 고려하면 이 해에 죽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