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color=#997000> {{{+3 {{{#white 부여[br]扶餘}}}}}} ||
||<-2>width=100%||
||<bgcolor=#997000><width=25%> {{{#fff 존속 기간}}} ||<-2><bgcolor=white,#2d2f34>기원전 2세기 ~ 494년 ||
||<bgcolor=#997000> {{{#fff 위치}}} ||<-2><bgcolor=white,#2d2f34>쑹화강 일대 송눈평원 ||
||<bgcolor=#997000> {{{#fff 수도}}} ||<-2><bgcolor=white,#2d2f34>북부여: 예성(濊城)[* 북부여 초기 수도. 현 중국의 지린 성 지린시로 추정.]→ 부여성(扶餘城)[* 현 중국의 지린 성 눙안현로 추정.] [br] 동부여: 여성(餘城)[* 출처는 광개토대왕릉비문. 현 중국의 지린 성 둔화시로 추정.] ||
||<bgcolor=#997000> {{{#fff 정치 체제}}} ||<-2><bgcolor=white,#2d2f34>군주제 ||
||<bgcolor=#997000> {{{#fff 국가 원수}}} ||<-2><bgcolor=white,#2d2f34>왕(王) ||
||<bgcolor=#997000> {{{#fff 주요 군주}}} ||<-2><bgcolor=white,#2d2f34>동명왕[br]해모수[br]해부루[br]금와왕[br]대소왕 ||
||<bgcolor=#997000> {{{#fff 언어}}} ||<-2><bgcolor=white,#2d2f34>부여어[* 고구려어와 같은 어족으로 추정] [[1]] ||
||<bgcolor=#997000> {{{#fff 종교}}} ||<-2><bgcolor=white,#2d2f34>무속신앙 ||
||<bgcolor=#997000> {{{#fff 국성}}} ||<-2><bgcolor=white,#2d2f34>해(解) ||
||<bgcolor=#997000> {{{#fff 종족 구성}}} ||<-2><bgcolor=white,#2d2f34>예맥, 읍루 등 ||
||<bgcolor=#997000> {{{#fff 성립 이전}}} ||<-2><bgcolor=white,#2d2f34>성읍국가[* 탁리(고리)국 설화가 알려져 있다.] ||
||<bgcolor=#997000> {{{#fff 멸망 이후}}} ||<-2><bgcolor=white,#2d2f34>고구려, 두막루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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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부여(扶餘)는 중국 동북 지방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왕조 국가이다.
부여의 존속기간은 고조선 후기와 삼국시대 중반에 걸친다. 대한민국 역사 교육에서는 단군과 고조선에서 모든 한국사가 시작되는 일원적 개념처렴 설명하고 있어 착각하기 쉬우나, 부여는 평양성에 도읍지를 둔 후기 고조선과 동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공존한 고대 우리 민족의 국가였으며 고구려, 백제 등 우리나라 주요 국가들이 부여를 계승하면서 한민족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남부여 등 다양한 부여 국가가 존재하며 고조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치는 않으나 삼국유사의 내용[* 삼국유사 왕력(王歷)편 “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을 보면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의 아버지[* 보통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로 알려져 있으나 단군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를 단군으로 표현하는 등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호
夫餘, 扶餘, 夫余, 扶余, Buyeo. 정장상팡(郑张尚芳), 또는 백스터(Baxter)와 사가르(Sagart)의 중국어 상고음 재구에 의하면 夫餘, 扶餘는 고대 중국인들이 /*pa.la/ '빠라' 또는 /*ba.la/ '바라'로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여의 국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푸후(puhu)'와 어원상 관련이 있다는 설
* 평야를 의미하는 한국어 '벌'의 고어형에서 왔다는 설
* '불'이 어원일 거라는 설. 여기에 왕족의 성씨가 해씨인 것과 연관지어 태양 숭배나 불 숭배와 관련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다만 解의 상고음은 kre~ke임에 주의.
참고로 '벌'을 고어 표기에서 훈차로 火로 표기한 사례가 많이 발견되므로, 만주어 유래설을 제외한 이름들은 공통적으로 '벌'에 가까운 글자를 음차했다는 의견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이 모두 명확한 사료가 없어, 그저 추측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한자로 쓸 때 부여의 '부'를 夫로 쓰는 경우와 扶로 쓰는 경우, '여'를 余로 쓰는 경우와 餘로 쓰는 경우가 모두 있다. 삼국지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는 대개 부여(夫餘)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서에는 대부분 부여(扶餘)로 기술하고 있다. [[2]]에서 夫餘와 扶餘를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애초에 餘는 余에서 파생된 글자이기에 전통적으로 餘의 약자로 余를 쓰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현행 표준 한자인 신자체와 중국의 간화자(간체자)는 餘를 폐지하고 余로 통합하였다. 단, 余 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많기 때문에 중국 간화자의 경우 의미가 혼동될 우려가 있을 경우 '남다'라는 의미를 명시하고자 할 때, 또는 본래 번체자(정체자) 표기에서 余가 아닌 餘였다는 걸 확실히 하고자 할 때, 부수 飠(食)을 饣으로 치환한 馀로 쓰는 걸 허용한다. 그래서 비록 중국어 간체에서 부여를 夫余나 扶余로 적는 게 일반적이지만 夫馀나 扶馀로 적기도 한다.
역사
부여 자체의 일원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역사 기록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등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 존재한다.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해서는 정확한 실체 규명이 힘들고 수많은 학설이 난립하고 있다. 동부여에 대해서는 북부여 왕인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가 변경되었다는 것과, 고구려가 410년에 침공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왕이 천도한 동부여와 고구려가 점령한 동부여를 같은 나라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도 완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 혹은 내부의 대가 세력과 같은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또 남부여는 백제에서 성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 부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 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이다. 여기저기에서 '부여'를 자처한 것으로 보아, 아래에서도 서술하겠지만 현대의 희미한 인상과는 달리 당대엔 의외로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호였던 듯하다. 혹은 단일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마한, 진한, 변한과 같이 일종의 원시국가들을 가리키는 집합체의 개념으로도 쓰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대개 일반적으로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이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이다. 이들은 이후 국력이 점차 쇠퇴하고, 선비가 발흥하면서 동쪽의 연길 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 지방으로 이동하여 쇠퇴한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서쪽으로는 흉노 - 오환 - 선비와 접했고, 동남쪽으로는 옥저, 숙신 - 읍루 - 물길#s-2과 접했으며 서남쪽으로는 고조선 - 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되고 있다.
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의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그 지배층들은 전연과 후연에서 벼슬을 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 5세기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의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 말갈,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해 있었던 듯하다.
건국 시기와 전신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 서주 ~ 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 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과 북방의 백금보 문화[* 반농반목적 문화로 현재의 길림성 북부 쑹위엔 시 일대였다. 과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동명왕 신화의 '탁리국'과 연관시킨 적도 있다.] 등의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으며,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 같은 청동기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 및 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 및 동검, 가는 무늬 거울 등이 발견된다. 이와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 및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 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세기 ~ 3세기로 보고 있다.
건국 시기는 보통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 사기 화식열전 등에도 부여가 언급된다. 물론 이것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거나, 기원전 3세기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록과 유물 등의 존재는 부여 이전에도 원시적 공동체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서단산 문화의 분포는 성읍국가 이상으로 보기에는 매우 작으며, 현재의 지린시 일대에만 나타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길림성 북부에는 백금보 문화로 불리는 반농반목적 청동기 문화가 있었다. 또한 남서부에는 철기를 개막한 이질적 문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대부분의 북중국 지역은 현재의 1개 성 단위가 4-5개의 이질적 문화권으로 쪼개진, 고대적 부족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다면 이런 부족 중 하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밖에 없다.]
건국 신화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아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
>《논형》 [[3]]
>《고기(古記)》에 이르길,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 BC 59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자기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를 성으로 삼았다. 왕은 훗날 상제(上帝)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였다.
>----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북부여 [[4]]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의 대신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라.【동명제가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왕도를 세우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하였다.
>
>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 대하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그 돌을 들추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는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라고 말하였다.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아이가 자라자 태자로 삼았다.
>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의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서기 22년)에 이르러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동부여를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동부여 [[5]]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설화가 굉장히 흡사하다.[* 이에 반해 백제의 건국 설화는 부여 및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비교했을때 매우 다르다. 특히 백제의 건국 설화는 난생설화가 아닌데, 부여,고구려 뿐만 아니라 신라 및 가야도 난생설화인걸 감안하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시대에 해당하는 한반도 국가들 중에서 건국 설화가 난생설화가 아닌 나라는 고조선과 백제 둘 뿐이다.] 동한대의 논형에 처음 부여 동명왕 신화가 언급된 것으로 볼 때, 동명왕 신화가 원형이며, 고구려가 어느 정도 국가를 정비한 단계에서 부여 시조 신화가 다르게 전래되어 동명성왕 신화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3세기 서적인 <위략>에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부여는 북만주 탁리국(다른 책에는 고리, 색리 등으로 기록)에서 탈출한 동명이 예맥의 땅에 망명하여 건국했다고 한다. 대체로 부여가 건국된 시기를 기원전 3세기로 본다. 위만조선이 건국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주몽의 출신지이며, 주몽의 고구려 건립 이래 대무신왕 5년(기원후 22년)까지 고구려와 대립하던 국가인 동부여가 등장한다. 삼국사기에서는 동부여에 대해서 대무신왕 5년 2월에 대소왕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수 가로 이주하여 해두국왕을 죽이고 갈사국을 세우는 등 내부혼란으로 쇠퇴하다가 같은 해 7월에 왕[* 대소왕으로 추정]의 종제(從弟;사촌동생)가 1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해와 왕으로 봉해지고 연나부에 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후한서와 삼국지 각각의 동이열전 부여조에서 부여가 후한이나 위나라와 교류를 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동부여는 후한서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부여와는 별개의 세력으로 추정된다.
전성기
부여의 전성기는 1세기~3세기인데,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후한 및 위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부여왕 간위거가 위나라 군대에게 군량을 제공하기도 했을 정도. 하지만 중국세력과 항상 핑크빛 관계를 유지한 건 아니어서 후한 안제 때인 111년에 기병과 보병 7~8천명을 이끌고 낙랑군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했던 적도 있었다.[* 이 기록은 하필이면 부여와 낙랑군의 거리가 멀고, 그 사이에 고구려가 있다는 점 때문에 낙랑군재요서설의 주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잘나갈 때는 옆나라 읍루를 복속시키기도 했다. 읍루가 황초(黃初, 220~226) 연간에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로부터 독립하긴 하지만.
진서에 따르면 고구려 동천왕 시기에도 부여는 8만여 호에 달하는 인구를 과시하며, 3만 호에 불과한 고구려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한 바 있다. 고대 국가의 국력은 인구와 비례한다. 이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당시 경제의 전부였기 때문이고, 무기 또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군사력이 인구수와 동일시되던 고대 사회로써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 실제 부여는 선제 이래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도성을 자랑하던 강국이었다.[*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위략에서는 '부여가 넉넉하고 풍성하여 선세 이래로부터 파괴를 겪은 적이 없다.'라고 했다.]
이에 비해 고구려는 건국 전기 약하던 시절 툭하면 도성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부여는 방어가 취약한 평야 지역에 도읍한 평지성이었고,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다. 게다가 부여는 최대 영토가 2,000리에 이르렀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동명성왕 ~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부여 세력을 부여 남부의 일개 대가 세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모용선비의 침입
하지만 이렇게 잘 나가던 부여도 285년 선비족 모용부에게 대대적으로 털리면서 쇠락기를 맞이했다. 서기 285년, 모용외의 침공에 10,0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의려왕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한다. 이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두만강 일대의 북옥저로 도피하였는데, 그 중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서진의 보호를 받으며 돌아가 나라를 되찾았다[復]. 한편 모용선비족의 부여 침입은 향후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북옥저에 일부 무리가 남아 동부여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유민들이 백제로 흘러들어가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 랴오닝성 후루다오시(葫芦岛市) 젠창현(建昌县, 건창현) 라마동진(喇嘛洞镇, 나마동진)의 선비계 유적을 부여계 집단의 유적이라고 본 견해[[6]]도 있었는데, 이들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까지 내려왔다는 내용이 역사 스페셜에서 방영되었다.[* 이를 부여족 남하설이라 부르는데 이말대로면 금관가야는 삼국사기 건국년도인 42년이 아닌 285년이 성립년도로 잡히게 된다.]
285년 모용선비족의 침공으로 옥저 지역으로 도망한 부여 유민들이 동부여를 형성했다는 설이 정설이다.
전연의 침입과 멸망
모용외의 침공에 부여는 국가 중심지를 기존의 지린성 일대에서 서쪽의 농안 지역으로 옮기나, 346년 결국 전연 모용황의 대공격에 부여왕 현을 포함해 무려 5만여 명이 끌려가면서 사실상 부여는 붕괴하게 된다. 이때 끌려간 인구가 5만 명이 아니라 5만 호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구당서를 신당서로 옮겨 적을 때 구(口)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던 것이 대표적인 예.
부여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410년에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동부여가 멸망하며 이것마저 맥이 끊겼다. 후기 부여의 중심지였던 농안 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북부여는 494년에 물길#s-2의 침입을 받고 완전히 멸망하여 494년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투항했다. 일부 세력은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한다.
정치
부여는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다.
정치는 귀족 정치로서 지배 계급에는 국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및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다. 관직의 명칭에 대해서는 만주원류고에 중국인들의 무지로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넣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지방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四出道)(사가도(四街道)라고도 함)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우가 등의 제가(諸加)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 계급인 민(民)을 하호(下戶)라고 칭하였는데, 그들은 지배 계급에 대하여 각종 노역과 물자 공급을 부담했기에 노비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전쟁시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식량 보급과 물자 운송을 담당했으며, 그때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갖추어 놓았던 무기를 갖고 호민(豪民)들을 모아 참전하였다. 호민이란 하호 중 부유하면서 어느 정도 자체적인 세력이 있었던 자들로, 영국의 요먼과 비슷한 계층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봉건제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국왕은 귀족 연맹체의 제사장 성격이 강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귀족 회의에서 폐출되거나 보통은 죽임을 당했다. 귀족 연정체제에서 "왕"이라는 호칭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군주제 체제가 계속 유지됐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름이 "왕"이라서 오해를 살 뿐, 당대로서는 제사장 정도의 느낌. 제가들도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일조하였고, 왕 또한 제가들이 뽑았으므로 왕을 내쫓거나 죽일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시간이 흐르고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졌으나, 다른 주변국들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쟁시 왕은 귀족들과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귀족의 대표로서 군림하였을 뿐, 귀족은 각자의 집단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이런 귀족 연정체제+선거군주제 체제의 나라는 응집력이 약하고 안정적이지 못하며, 나라가 쇠락하기 시작하면 갈기갈기 찢어지고 순식간에 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정치 제도 때문에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였음에도 대소왕이 고구려의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잡혀 참수당하자 귀족 세력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는 결과적으로 부여의 힘을 분산시켜 후대에 부여가 다시는 고구려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사회
혼인을 할 때는 혼납금으로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소와 말을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간음을 엄격히 금지해서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는 경우에는 모두 죽였으며, 특히 부인이 질투하는 것을 나쁘게 여겨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했다. 만약 죽음을 당한 여인의 친정에서 딸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 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했는데, 이것은 혼인 때의 혼납금을 반환하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고구려와 같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인 형사취수가 있었다.[* 고구려의 사회법 중 대부분이 부여와 유사한 걸로 보아 고구려의 사회법도 부여에서 따온 걸로 추정.]
추수가 끝난 후 영고#s-2라 불리는 제천 행사를 벌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동맹#s-2, 동예의 무천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영고는 유목 민족의 수렵제 성격이 남아 있어 동맹이나 무천과 달리 10월이 아닌 12월에 거행되었다.--부영↗️고~~--
노비 제도가 존재하였다. 순장은 대부분 노비로 채워졌다. 순장된 노비는 전쟁 포로 출신 뿐 아니라 형벌 노비와 부채 노비도 있었다. 때문에 변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노비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법에는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그리고 남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다.[* 이 12배 변상은 고구려도 마찬가지,]
언어
* [부여계제어 항목]
같은 예맥 계통인 고구려어와 비슷하였을 거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지만, 관련 자료가 워낙에 부족한 관계로 얼마나 유사성이 높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부여의 사람의 성 解氏(해씨)는 순우리말이며, 사용한지 가장 오래된 말로 확인되는데, '태양'을 의미한다. 2015년 통계청 기준으로 9명이 확인된다고 한다.
경제
만주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농사를 주 산업으로 한 농경 국가였으나, 동시에 목축과 기마술에도 능한 반농반목의 경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 덕분에 당시 북방의 패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중국에 말을 수출하기도 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말, 붉은 옥(적옥, 赤玉), 구슬 장식품(미주, 美珠), 담비나 돼지, 여우, 원숭이 등의 짐승 가죽이 있었다.
역대 국왕
[include(틀:역대 부여 국왕)]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부여/왕사)]
인물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부여/인물)]
종교와 문화
> 부여 사람들은 과격하고 크며,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몸가짐이나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할 줄 알고, 성품이 어질고 덕이 많아 도둑질하지 않는다. 여럿이 모일 때 공손히 서로 예의를 지킨다.
>----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중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부여조의 영고#s-1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의 백성이 동네마다 한데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식 직전에 "맞이굿(迎神祭)"을 벌였다고 한다. 때문에 제천 의식에 기초한 샤머니즘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제천 의식을 행했는데, 이때 소를 죽여 그 굽을 살펴서 길흉을 점쳤다. 만약 굽이 갈라져 있다면 이를 흉조로 여겼고, 그렇지 않다면 길조로 여겼다.
또한 흰색을 숭상하여, 흰 옷을 즐겨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례 문화가 상당히 어마어마했는데, 죽은 사람의 장례는 무조건 5월에 치뤘다. 만일 다른 달에 죽으면 5월까지 보존했고, 심지어 당시에는 귀한 얼음까지 팍팍 써 가면서 최대한 시체의 부패를 늦추었다. 다른 설로는 무조건 5월에 장례를 치른 게 아니라,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3년상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이쪽이 더 현실적. 이런 장례 의식을 후장이라고 불렀다는 모양이다(...) 아니 얼마나 추운 동네였길래 그게 가능한 건지도...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와 함께 부여의 물질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면, 부여 문화의 출발은 청동기시대의 서단산 문화로서, 그로부터 초기 철기시대의 대해맹-포자연 문화로 이어져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예 대해맹-포자연 문화를 부여로 인식하는 연구자들도 더러 있는 편이다. 서단산 문화의 니질계의 회도들이 확인되는 층위의 위로 대해맹-포자연 유적의 층위가 확인되고 있으며, 토기의 유형 또한 유사하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파일:서단산 문화와 유수 노하심.jpg
가장 우측의 토기는 유수 노하심 유적의 출토품이고, 그 옆의 토기는 서단산 문화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확인된 토기이다.
이는 기원전 1세기 말부터 기원후 3세기 사이의 유적인 중국 길림성 유수시 노하심촌 유적, 즉 유수 노하심 유적에서 확인되는 독특한 형태의 동이류의 토기들과도 관련이 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파수부가 2개씩 부착되는 특징이 확인되며, 독특한 구연부의 형태를 갖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특징적인 요소들이 부여 문화의 기저 유형으로 인식되는 서단산 문화에서 확인되는 토기 유형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특히 서단산 문화가 확인되는 유적의 층위 바로 위로 포자연 유적, 대해맹 유적들이 확인되는데, 이 유적들에서 바로 저러한 쌍이부호들이 확인되므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부여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통상 '유수 노하심' 유적이라고 불리는 중국 길림성 유수시 노하심촌의 노하심 유적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길림성 길림시의 동단산 유적, 서단산 유적, 모아산 유적 등이 있다. 조사가 되었지만 보고서가 정식으로 발간된 유적은 유수 노하심 유적밖에 없으며, 다른 유적들은 보고서가 간략한 형태로만 짧게 보고되었다. 모아산 유적 같은 경우에는 당대의 사회상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고분 자료 중심의 유적이지만,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발간되지 않아서 자세한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혹시나 싶어 첨언하자면 동북공정 때문은 아니고 원래 중국 고고학계 자체가 한족과 관련된 유적에 포커스가 자주 몰리는 편이고, 다소 매스컴의 인기를 끌 만한 금은보화들이 나오지 않으면, 보고서의 발간 작업 자체가 많이 느린 편이다[* 사실 다른 이유도 있는데, 문화대혁명 당시에 벌어진 희대의 반달리즘때문에, 비슷한 일이 또 있을 걸 우려해서 중국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1960년대에 명나라의 만력제의 능을 발굴하는 와중에 홍위병들이 들이닥쳐서 고고학자들을 끌고가서 코로 탕수육을 먹이고 발굴된 유물과 유골들을 박살내버린 흑역사가 있어서, 중국 공산당이 아직까지도 건재한 이상, 똑같은 짓을 하려는 또라이가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유적 발굴을 꺼리게 된 것이다. 때문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한족들이 세운 게 분명한 명나라 시대의 황릉들조차 하나도 발굴하지 못하고 입맛만 다시는 판국이라, 이민족, 그것도 타국 사람들이 세운 유적의 발굴에 의욕적일 리가 없다.]. 한국이나 일본이 고고학적 발굴조사의 보고서의 발간 시스템이 투명하고 공식적인 편이다[* 물론 일본에서는 거짓말하다가 걸린 사람도 있기도 하다.]. 따라서 사실상 구체적인 부여의 물질 문화를 담고 있는 실물자료로는 유수 노하심의 보고서 외에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파일:유수 노하심 유적과 기타 선비 유적의 비교 검토.jpg
부여의 유적과 유물에서 다소 뜻밖(?)인 점은 바로 선비 계통의 유적과 상관성이 많다는 점이다. 사실 동북지역의 1~3세기 토기 문화의 전개 과정은 앞선 청동기시대부터 한 문화의 성립 즈음까지 매우 복잡 다변하게 전개되므로, 저런 질 나쁜 도면 몇 장으로 토기 문화의 동질성 내지는 상관성을 역설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한 한계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금속 유물 및 장신구류[* 지면의 한계가 있지만 대부분의 장식 유물들이 흔히 선비족 유적의 표지적인 유물 세트와의 관련성이 돋보인다. 청동 단추라던지 조개 껍질(화폐(?)), 청동 방울 등.]의 조합상을 보면 저런 동물문 장식의 계열 자체가 스키타이 계열의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며, 귀걸이[이식(耳飾)]의 형태 또한 조형(祖形)을 따지고 보면 북방 계열, 즉 내몽골 쪽의 기원 전후한 빠른 시기의 유적에서 기원이 찾아지기도 하기 때문에 부여와 선비족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그리 놀랄 것도 아닌 것이 흔히 알려진 신라 금관들의 장식들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런 고구려는 선비족 계열의 국가들인 삼연(三燕)의 물질 문화와의 상호교류의 흔적이 두드러 진다. 그만큼 동북아시아 국가나 집단의 상호교류가 활발했었다. 물론 신라의 금관의 장식적인 요소 일부들이 관련이 있다는 점이며, 전반적인 금관 자체의 신라 특유의 아이덴티티는 엄연히 신라 독자적인 요소로 엄존하고 있음을 전제에 둔다.]
파일:유수노하심 귀걸이 사본.jpg
그래도 위와 같은 귀걸이는 조형이 내몽골의 흉노, 선비 계열의 유적에 있다 할 뿐이지 그래도 분포 지역의 패턴을 살펴보면 오롯이 부여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양식을 갖춘 편이다. 위의 사진과 같은 형태 외에도 새끼손톱 모양의 귀걸이도 있는데, 이 역시 부여계로 볼 수 있는 유물이다. 특히 이 손톱 형태의 귀걸이는 요령성 환인현의 망강루 고분군, 길림성 통화시 만발발자 유적에서도 확인되는데, 두 고분군은 모두 초기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돋보이는 고분군이기도 하다. 또 김포 운양동 유적에서도 같은 형태의 귀걸이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위의 사진에서 우측의 귀걸이의 형태는 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요령성 북표현 라마동 고분군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유적은 삼연, 즉 선비족의 고분 유적이기도 하다.]
여하간 위의 이유로 인해서 부여와 선비나 흉노와의 고고유물의 조합 및 자체적인 판별에 대한 논의가 많다. 동경의 경우 선비족은 파훼하여 부장하는 점이 특징이지만, 유수 노하심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동경이 많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서차구 고분군에서는 파훼된 동경이 확인되고 있으며, 선비 계통의 삼족기도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또 부여계의 이식도 확인되고 있어 교류의 흔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떠한 유물이 어떠한 형태인가를 두고 완연한 부여계의 물질 문화인가를 정의하는 것은 아직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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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14년 10월 29일, 국립중앙박물관이 공개한 일제가 수집한 유물 중 부여 금동 가면 [[8]] 이 공개된 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일제강점기 유리 건판 목록과 문서 열람 서비스에서도 사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중국 길림성에서 채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파일:유수노하심 부여 가면.jpg
위의 일제강점기에 채집한 가면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가면이 중국 길림성 길림시의 동단산 유적에서 채집된 바 있다.[* 참고로 채집이라 함은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되거나 유물 신고에 의해서 입수된 것을 뜻한다.] 위의 유물은 길림성박물관의 부여관에서 전시 중에 있다. 이러한 가면을 부장하는 특징 또한 선비족의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파일:동단산 유적 전경.jpg
그 외에도 동단산 유적의 바로 밑에는 동단산 평지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 바로 뒤로는 모아산 유적이 넓게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초기 부여의 도성지로 추정케 하는 근거가 되는 유적들이기도 하다. 이 동단산의 바로 앞에 흐르는 송화강은 길림시를 동서로 구분하는데, 동단산 유적에서 10여 km 정도 서쪽에는 바로 서단산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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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지린 성 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부여의 철 찰갑과 철검. [[9]] 지금은 동북공정의 영향인지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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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철검의 다른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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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
북방 지역의 평원에서 기른 말로 인해 기마술이 발달했고, 중기 이후 철기를 사용했다.
부여는 중국과 특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선비족의 연계가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부여 입장에서도 고구려와 주변 기마 민족들이 부여에 적대적이었기에 양국의 이해 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물론 몇 차례 중국과 부여의 충돌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매우 적었던 데다 충돌 시에도 부여의 군사력은 중국에 결코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평가하기를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에게 패해 본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위 한사군과는 2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111년에는 7,000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낙랑군을 공격하였고, 167년에는 부여 왕이 직접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위의 사례는 정말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어서 왜 대립했는지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 직후에서 멀지 않은 120년과 174년에 부여에서 오히려 중국에 복속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단순한 약탈은 아니고 무언가 정치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국과 대립하는 관계 일변도는 아니었다. 후한서에서는 111년의 침공을 (부여의 침공으로서) '처음'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큰 대립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부여에 대해서는 굉장히 우호적으로 서술하여 '식량이 모자라 주변을 털고 다닌다'고 기술한 고구려와는 차이가 있으며,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부여에서 식량을 얻어가는 등 중국을 지원한 사례도 존재한다.
선비족과의 충돌도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중반, 단석괴가 선비족을 통합하고 부여, 오손, 정령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며, 부여를 끝장낸 285년, 346년의 모용선비 침공이 대표적이다. 서진의 사마염이 부여인 노예 매매를 금지시키고, 부여로 되돌려보낸 일화도 고려하면 기록이 안된 모용선비족의 약탈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동한 초기에 읍루를 복속시켰으나 3세기 초 읍루가 부여의 지배권을 이탈하면서 읍루와도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다만 읍루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다시 복속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부여 왕이 사망할 때 부여가 동한측으로부터 '옥갑(玉甲)'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일부 환빠들이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금루옥의(황금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한나라로부터 조공받은 것이며, 부여는 따라서 황제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일단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부여가 중국에 속(屬)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부여가 현도군에서 옥갑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지, 조공 등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당연히 황제국이 타국에 속할 리는 없는 노릇이므로 일단 관계 설정 자체가 거짓이다. [참고].
한편 금루옥의 관련해서 규정이 있는 것은 <후한서> 예의지 하권이다. 여기서 인용한 <한구의>를 보면,
>① 漢舊儀曰:「帝崩,唅以珠,纏以緹繒十二重。以玉為襦,如鎧狀,連縫之,以黃金為縷。 ② 諸侯王、列侯、始封貴人、公主薨,皆令贈印璽、玉柙銀縷;大貴人、長公主銅縷。(<후한서> 권 96 예의 하).
동한의 황제가 입는 수의로 규정된 것은 금루옥의가 맞지만(각주의 ①), 그 뒤에 등장하는 규정에 따르면 제후 왕 등은 은루옥의(은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대귀인과 장공주 등은 동루(옥의)(구리 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각주의 ②).
그러니까 실을 금으로 짜는 것이 황제의 규정일 뿐 실만 다르면 옥의는 제후 왕을 포함한 황제 이하의 여러 인물들이 입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물건이었던 것이다(그리고 그렇다면 부여 왕은 형식상 제후 왕의 격식에 따라 수의로 은루옥의를 입었을 것이다).
따라서 환빠들이 부여가 황제국이라고 주장했던 옥갑 관련 사료는 오히려 부여가 동한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서 동한의 예법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고, 동한에 제도상 복속해 있었음을 드러내는 사료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부여가 한나라에 속했다는 말이 중국의 속국이나 지방 정권이라는 뜻이라는 게 아니다. 이는 부여가 중국과 동맹을 맺고, 교역을 하기 위해 명목상 칭신을 하는, 당대의 외교적 관례를 잘 알았다는 의미다. 자세한 건 조공 문서 참조.]. 물론 이런 것과 관계 없는 순수한 연구자라면 부여가 한나라의 국제 질서에 속하여 동한에 대해 제도적으로도 충분히 지위를 보장받았다고만 알고 넘어가면 된다.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보통 한국사에 등장하는 모든 국가들은 대부분 한반도에 영토가 있어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부여는 (동부여를 제외하면) 한반도에 영토를 가진적이 없었던데다가 고조선과 진국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러 전란으로 사서가 유실된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남아있는 기록들도 부실하여 한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 교육에만 충실했다면 원삼국 시대에 이런 국가가 있었다는 정도의 비중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대표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가 정신적으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였다. 고구려는 시조 추모성왕의 시호를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에게서 따왔고, 건국 신화 또한 동명왕 신화를 차용했을 정도였으며, 특히 백제 같은 경우는 왕실의 성이 부여씨였고, 국호를 아예 남부여로 바꾼 적도 있을 만큼 중요시하였다. 이로 인해 현재 남한에도 부여군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한반도 사람들은 부여에서 내려온 북방계로(남부는 남방계와의 혼혈) 부여인의 유골이 현대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깝다고 나오기도 했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가 둘 다 부여의 후예라는 계승의식과 별개로 이들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삼국통일전쟁 막판의 여제동맹 구도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한 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멸망 이전 몇십년 정도에 한정된 관계였고, 왕조 존속기간 수백년을 통틀어 보면 이들이 신라와 사이가 안 좋았던 기간보다 여제가 서로 원수지간이던 기간이 훨씬 길었다. 현대 남북한관계도 그렇듯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실제 외교에서도 친밀함을 담보하진 않았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인들과 부여인들이 백의(白衣)를 즐겨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후계 한국사 국가들도 백의를 즐겨입는 성향이 있어서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국의 전통놀이 문화인 윷놀이의 기원론 중 하나가 부여기원론이며 윷놀이 용어는 부여어라는 게 중론이다. 중국 북송 때의 백과사전 태평어람에서도 부여 관련 얘기로 나온다.
부여는 5세기 말에 사라지지만 그 유산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남는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발해 왕 대무예가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일본에 선언한 것이 그 흔적. 훗날 고려에서도 만월대 내 별궁 중 한 건물을 부여궁(夫餘宮)이라 명명하여 부여를 한국사를 이루는 고대국가 중 하나로 인식하고, 계승의식을 나타냈다.
한국사뿐만 아니라 부여가 자리잡은 지역이었던 만주사에서도 중요한 나라로, 7세기에 속말말갈의 수령 돌지계가 수나라로부터 부여후에 봉해졌고, 여진의 금나라도 건국할 때 부여를 언급했다.[* 다만 말갈과 여진 등 숙신계 민족들은 부여를 비롯한 예맥계 민족들과 이질성이 존재했다. 애초부터 부여인들은 읍루와 말이 통하지 않고 착취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부여라는 나라는 한반도에서도, 만주에서도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부여는 이후 고구려를 잇는다고 선언한 고려왕조의 문종 인효대왕의 왕자 왕수#s-2의 봉국명으로 사용됐다. 이는 중국 왕조가 전왕조들의 국호를 제후에게 봉한 사례를 따른 것이다. 왕수의 작위는 후작에서 진작된 부여공(扶餘公). 또한 중국 송나라의 고려도경엔 고려가 제후에게 준 부여궁(扶餘宮)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부여궁은 부여국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백제와 함께 두막루도 부여에서 계승되는 후계국이다.
부여에서 유래한 이름
한국
* 부여와 백제의 왕성(王姓) 부여씨 - 백제에서는 부여 계승 의식에 의거하여 부여를 왕성으로 삼았다. 한국의 국성 중 유일한 복성이다. 중국에서는 편의대로 여(餘)씨로 줄여서 기록했다. 실제로 夫 자는 한문에서 그냥 별 의미 없는 발어사(發語辭)로 쓰는 경우가 많다. 고대 중국인들이 백제 왕족을 언급하는 문장에 적혀 있는 夫餘나 夫余를 복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발어사로 夫를 쓴 다음에 한 글자 성씨로 餘나 余를 기재했다고 오독했거나 혹은 백제 왕실이 중국 왕조와 무역할 때 중국식으로 한글자 성씨인 餘씨로 줄여서 소개한 것이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부여의 '여'(餘 또는 余)와 성씨 서(徐)는 余를 구성 요소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의외로 선비족에 의해 요서로 이주된 이후의 부여 왕족들도 성씨가 부여씨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부여씨를 쓰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후예는 현재 서씨와 여씨로 전해진다고 한다.
*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 성왕이 세운, 백제의 도읍 사비성이 있었다. 한 때 강성했던 부여의 이름이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백제 성왕 대에는 잠시 백제 국호가 남부여로 변경되기도 했다. 다만 전통적으로 역사서에서 국호에 들어간 성씨, 방위 표시나 전·후 같은 수식어는 후대에 동명의 왕조들을 구분하기 위해 첨가하는 것이었지, 실제로는 이런 수식어를 뺀 게 실제 국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실제로는 성왕이 국호를 그냥 '부여'라고 고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부여가 됐든 부여가 됐든 이 국호가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불명확하다. 성왕의 국호 변경 이후 시기를 기록한 역사 기록(중국측 기록 포함)에는 그냥 백제로 표기된다. 또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나 미륵사지 사리봉안기 등 성왕 이후의 백제 유물에서도 백제라는 국호만이 표기될 뿐더러 훗날 후삼국시대 견훤이 이 나라를 계승해 세운 나라의 국호가 백제(후백제)였지, 부여나 남부여는 아니었다. 따라서 성왕이 선포한 (남)부여라는 새 국호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것이다. 학계에서는 정통성 강화를 위한 일시적 국호 변경 퍼포먼스에 불과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중국
* 중국 지린 성 쑹위안(松原) 시 푸위(부여, 扶餘/扶余(정체 扶餘, 간체 扶余) 시 - 중국에도 부여가 현존한다. 본래 부여의 옛 땅이라 중화민국 정부가 1915년에 푸위현(縣/县)을 설치했다. 그 후 2013년 1월 23일 중국 국무원에 의해 푸위 시로 바뀌었다. 쑹위안 시 안에 푸위 시가 있는 형태이다. 오타 아니다. 중국의 행정구역 체계상으로는 두 도시의 등급이 다르다.
기타
* 김진 작가의 만화 바람의 나라를 바탕으로 한 바람의 나라(드라마)에서는 고구려와 적대하는 나라로 등장하며, 국력 역시 고구려보다 우위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후반부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수도까자 함락당하는 안습한 모습이 나온다. 시청률은 나쁘지 않았으나 바람의 나라 드라마 자체가 종영 후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역사왜곡스러운 부분들[* 갑옷고증도 문제지만 고대 전쟁에서 퇴출되었던 전투 마차를 굴리는 모습이나 부여를 멸망시킨(?) 대무신왕이 최강국이었던 후한을 공격하겠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이 크게 조명되지는 못했다.
* 삼국전투기에서는 부여라는 나라 자체가 다스베이더로 패러디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좋아한 걸로는 루크는 고구려로 패러디해야 하겠지만, 정작 고구려와 부여 사이는 좋지 않았다.] 위엄 쩌는 전성기와는 달리 시기 자체가 몰락기라 위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고구려를 설명할 때 곁다리로 살짝 언급되는 정도다.
참고 자료
연구 자료
* 강만길 외, 《한국사 2 -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한길사, 1995년
* 백산자료원 편집부, 《고조선 부여사 연구》, 백산자료원, 1995년
* 송호정, 《한국사.4 - 초기국가 고조선 부여 삼한》, 국사편찬위원회, 1998년
* 서병국, 《동이족과 부여의 역사》, 혜안, 2001년
* 박경철 외, 《고조선 단군 부여》, 동북아역사재단, 2004년
* 김기섭 외,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역사재단, 2008년
* 송호정,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년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의 논란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여가 다양한 한국사 시험의 고난도 문제에서 교과서적 내용과 학술적 내용의 일부 충돌로 인해 논란이 있다.
* 사례 1. 1책 12법은 (부여/고구려)의 풍습?
> 형벌은 엄격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하면 12배를 배상하게 하였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도둑질과 관련된 내용은 소위 '1책 12법'이라고 하여, 부여를 설명해 놓고 보기로 자주 제시된다. 그런데 정상적인 출제 기관이라면 반대로 '1책 12법'을 설명해 놓고 부여와 고구려 중에 고르라는 유형의 문제는 나올 수가 없다. 둘 다 1책 12법이 있었다는 사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고구려를 제시해 놓고 '1책 12법'을 고르라는 문제도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법률에 대한 기록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서> 고구려전에서는 도둑질에 대해 10여 배, <수서>·<북사>·<신당서>에는 10배, <구당서>에는 12배를 내도록 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사료가 잘못된 것인지 시간적 변천이 있었던 것인지 역사학적으로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학술적인 문제고 점수를 가려야 하는 문제에서 고구려에 1책 12법이 있었는가에 대해 단순히 O, X 퀴즈를 내면 맞다고 볼 수도 없고 틀리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사료는 모두 6세기 이후 고구려의 상황을 다룬 사료이므로, 3세기의 상황(<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출처로 하는 기술)을 놓고 위에서 말한 '나올 수 없는' 유형의 문제를 내면 일단 부여-1책 12법을 찍어놓고 출제 기관에 항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 사례 2. 우제점법은 (부여/고구려)의 풍습?
2017년 12월 16일에 치뤄진 9급 공무원 지방직 추가채용 시험에서 '우제점법이 부여와 고구려의 공통 풍습이다 아니다'를 가지고 복수정답 논란이 생겼다. 일부 교재에서는 공통 풍습이라고 씌여있었고, 심지어 몇몇 한국사 강사들이 사료까지 제시해가면서 고구려에도 있는 풍습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출제자 측에서 묵살(...)하였다. 다만 이는 조금 애매한 면도 있는데, 우제점법이 제시된 것이 정사25서가 아닌 한원이라는 점,[* 이런저런 사료 다 들고 오면 우제점법은 전세계에서 엄청나게 많은 지역에서 있었던 풍습이다.] 교과서적 내용과 실제적 내용이 충돌하는 부분은 고대사에서 수백 곳은 된다는 점 등이 있다. 애초에 고조선으로 보자면 미송리식 토기니 고인돌이니 하는 내용은 모두 30년 전에 폐기된 학설이다.
* 사례 3. 부여 vs 동부여
2017년에 시행된 역사교사 임용고시에서는 광개토왕비문의 특정한 내용을 발췌해서 제시한 후에, 괄호 안에 들어가야 할 나라를 적으라는 문제가 나왔다. '부여'라고 적은 사람이 많았지만 정답으로 처리된 것은 동부여였다. 이유는 비문을 그대로 가져왔으며 비문에 동부여라 적혀있기 때문이었다. 부여는 오답 처리되어서 오답률이 극악무도하게 높았다고 한다.
[include(틀:원삼국시대 한반도 세력)]
같이보기
* 성읍국가
* 원삼국시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