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민영익(閔泳翊) | |
대표명칭 | 민영익 |
---|---|
한자표기 | 閔泳翊 |
생몰년 | 1860년-1914년 |
본관 | 여흥(驪興) |
호 | 운미(芸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 |
자 | 우홍(遇鴻) |
시대 | 근대/개항기 |
국적 | 조선/일제강점기 |
대표저서 | 「묵란」(1904, 간송미술관), 「노근묵란(露根墨蘭)」(삼성미술관 리움) |
대표직함 | 혜상공국총판 |
부 | 민태호(閔台鎬) |
모 | 민태호 처 진천 송씨 |
성격 | 정치가·문인·화가 |
유형 | 인물 |
목차
정의
근대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인화가이다.
내용
가게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우홍(遇鴻)·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 등이다. 아버지는 민태호(閔台鎬),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1]민승호가 죽은 뒤 양자로 입양되어 민비의 친조카가 되었다.
일본과 미국 방문
1877년(조선 고종 14)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개화당 인사들이 그의 사랑에 자주 출입하였다. 신식군대와 구식군대 사이의 갈등과 마찰로 인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민씨척족세력의 거물로 몰려 가옥이 파괴당하였다. 그리고 군란 진압 후 박영효(朴泳孝)를 정사로 하는 사죄사절이 일본으로 파견될 때,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비공식 사절로 3개월간 일본의 개화 진행 상황을 시찰하였다. 이어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權知協辦交涉通商事務)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이 1882년 외아문과 내아문으로 개편될 때, 김옥균과 같이 부교사협판(富敎司協辦)이 되었다. 1883년 5월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 L. H.)가 내한하자, 그 해 6월 이에 대한 친선사절 보빙사(報聘使)의 정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였다. 1884년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미국 방문 후 여러 근대화 시설을 들러보고 감명을 받아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育英公院),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 등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다.[2]
개화파에 등을 돌리다
1884년 10월 친군영(親軍營) 실시 뒤 우영사(右營使)로 있으면서 개화파를 압박하였다. 그런데 그 해 12월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개화당의 김옥균 등이 주도하여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전신에 자상(刺傷)을 입었다. 그러나 홍영식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Allen, H. N.)의 치료를 받아 3개월 만에 친군영에 복직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파견하였다. 1885년 초 임오군란 후 청나라에 납치, 유폐된 흥선대원군의 회국 의사를 표명해 온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대원군의 귀국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톈진에 가서 대원군의 회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1886년 정부의 친로거청정책(親露拒淸政策)을 반대하는 한편,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이러한 사실를 밀고하였다가 정치적 위협을 느껴, 1887년 내탕금(內帑金)을 가지고 홍콩과 상해(上海) 등지를 전전하였다. 귀국하여 통위사(統衛使)가 되었고, 1888년 6월 연무공원판리사무(鍊武公院辦理事務)로서, 학교의 운영 담당 위원이 되어 한규설(韓圭卨), 이종건(李鍾健) 등에게 실무를 맡도록 하였다.[3]
상해 망명
1889년 5월 관세를 담보로 외무 고문 데니(Denny, O.N.)와 프랑스 은행으로부터 200만 냥의 차관 계약을 맺어, 그 중 130만 냥으로 종래 차관을 청산하고, 나머지 70만 냥으로 정부재정을 재건해 보려고 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어 판의금부사, 1894년 선혜청당상이 되었으나, 그 뒤 고종의 폐위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홍콩, 상해 등지로 망명하였다. 그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그곳에서 사망하였다.[4]
예술활동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부친 민태호(閔台鎬)와 숙부 민규호(閔奎鎬)를 이어 15세 무렵 서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개화파와의 대립으로 상해에 정착했을 때, 오창석(吳昌碩), 포화(蒲華), 서친주(徐親周), 고옹(高邕) 등 상해 서화가들과 교유하며 문인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현전 작품으로는 「묵란」(1904, 간송미술관)과 「노근묵란(露根墨蘭)」(삼성미술관 리움)이 대표적이며 다수의 사군자가 전하고 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민태호 | 민영익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민태호 처 송씨 | 민영익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민영익 | 민승호 | A는 B의 양자이다 | A ekc:IsAdoptedHeirOf B |
민승호 | 민치록 | A는 B의 양자이다 | A ekc:IsAdoptedHeirOf B |
명성황후 | 민치록 | A는 B의 딸이다 | A ekc:hasFather B |
민영익 | 임오군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민영익 | 김옥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민영익 | 박영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민영익 | 푸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김옥균 | 갑신정변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갑신정변 | 민영익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민영익 | 알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임오군란 | 이홍장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임오군란 | 위안스카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임오군란 | 흥선대원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민규호 | 민영익 | A는 B와 친족이다 | A ekc:isLineageKinOf B |
민영익 | 오창석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민영익 | 포화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민영익 | 서친주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민영익 | 고옹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노근묵란 | 민영익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묵란 | 민영익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최경현, "민영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작일: 2015년 4월 13일. - ↑ 최경현, "민영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작일: 2015년 4월 13일. - ↑ 최경현, "민영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작일: 2015년 4월 13일. - ↑ 최경현, "민영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작일: 2015년 4월 13일. - ↑ 최경현, "민영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작일: 2015년 4월 13일.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노대환, 「閔泳翊의 삶과 정치활동」, 『韓國思想史學』 18, 한국사상사학회, 2002, 463-497쪽.
- 류기수, 「閔泳翊과 海上畵派의 交友 關係 考察」, 『中國學硏究』 43, 중국학연구회, 2008, 429-456쪽.
- 웹자원
- 최경현, "민영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작일: 2015년 4월 13일.
- 최경현, "민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