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
설총(薛聰) | |
대표명칭 | 설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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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薛聰 |
생몰년 | ?-? |
자 | 총지(聰智) |
시대 | 신라시대 |
국적 | 신라 |
대표저서 | 화왕계(花王誡) |
대표직함 | 한림(翰林) |
부 | 원효(元曉) |
모 | 요석공주(瑤石公主) |
정의
신라 중대의 대학자.
내용
자는 총지(聰智).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고,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육두품 출신으로 추측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1] 6두품 신분으로 추정되며,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2]
한때 설총이 이두(吏讀)를 창시했다고 알려졌으나, 설총 이전의 금석문(金石文)에서도 이미 이두를 사용한 예가 있으므로, 창시가 아니라 집대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설총은 한당유학(漢唐儒學)을 중심으로 훈고학(訓古學)적 학풍을 따랐을 것으로 추측한다.[3]
화왕계(花王戒)
설총이 지은 설화로 그의 유일한 유문(遺文)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따르면, 곁에서 아첨하는 미인(美人) 장미(薔薇)에 빠졌던 화왕(花王)이베옷에 가죽띠를 두른 차림으로 찾아온 백두옹(白頭翁, 할미꽃) 두 사람을 두고 누구를 택할까 망설이는 것을 보고 백두옹이 화왕에게 간언(諫言)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들어 설총이 신문왕을 깨우쳤다고 한다.[4]
화왕계에 보이는 설총의 생각
이 이야기의 핵심은 임금은 마땅히 어질고 실속 있는 신하를 얻어야 하며, 신하는 행여 쓰임 받지 못하여도 크게 낙심하거나 원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유교의 인식체계가 보이는 결론이다..[5] 설총이 지은 다른 글들은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하던 무렵에도 이미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 온 것이 없고,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총이 지은 비명이 간혹 남았어도, 글자가 망가져서 읽을 수 없다. 아쉽게도 어떠한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는 대목이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준다. 남았다는 것이 아마도 ‘감산사 아미타여래 조상기(甘山寺 阿彌陀如來造像記)’ 같은 비문일
것으로 보인다.[6]
지식 관계망
- 원효와 의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원효 | 설총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요석공주 | 설총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화왕계 | 설총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주석
- ↑ 박노춘, "설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설총",
『두산백과』online . - ↑ "설총",
『두산백과』online . - ↑ "화왕계",
『두산백과』online . - ↑ 고운기, "설총,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고운기, "설총,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