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재
길재(吉再) | |
대표명칭 | 길재 |
---|---|
한자표기 | 吉再 |
생몰년 | 1353년-1419년 |
본관 | 해평(海平) |
시호 | 충절(忠節) |
호 |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
자 | 재보(再父) |
시대 | 고려말 조선초 |
국적 | 고려, 조선 |
부 | 길원진(吉元進) |
정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학자이다.
내용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1]
당대에도 명망 높던 학자
길재가 살아있을 때 이미 그의 명성은 당대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절의와 인품에 감탄한 군수 이양(李揚)이 율곡동에 논과 밭을 주었으나 ‘무릇 물건이 아무리 풍족하다 한들 그 종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기증 받은 논과 밭을 사용할 만큼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또 세종이 자신의 자손들을 등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했듯이 후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한다면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며, 길재는 제사를 당하면 나물밥으로 공양하고 우는 것을 초상 때와 같이 하였다. 첫닭이 울 때 의관을 갖추고 사당, 조상에게 절을 하면서 자제들과 경서를 강론하는 등 학자로서의 본보기를 보였다.[2]
평생 학자로 살다
이로 인해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길재는 항상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였다. 그는 오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두 왕조의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머물렀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3]
저서로는 『야은집(冶隱集)』과 『야은속집(冶隱續集)』이 있으며, 그밖에 그의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해지고 있다.[4]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5]
지식 관계망
- 이색과 정몽주와 이숭인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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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진 | 길재 | A의 아들은 B이다 | A ekc:hasSon B |
길재 | 삼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길재 | 김종직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길재 | 김굉필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길재 | 정여창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길재 | 조광조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주석
- ↑ 박천규, "길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길재",
『나무위키』online . - ↑ "길재",
『나무위키』online . - ↑ 박천규, "길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천규, "길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박천규, "길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천규, "길재",
더 읽을거리
- "길재",
『나무위키』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