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학교
오산학교(五山學校) | |
대표명칭 | 오산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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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五山學校 |
유형 | 교육단체 |
창립자 | 이승훈 |
창립시대 | 현대 |
창립일 | 1907년 12월 |
웹사이트 | 오산고등학교 |
목차
정의
한말 민족 교육을 위해 이승훈(李昇薰)이 평양북도 정주에 설립한 민족 학교이다.[1]
내용
설립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서 상업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07년 7월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민족을 위한 교육과 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신민회(新民會)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서북 지방 최초의 사립 중학교였던 오산 학교는 1907년 창립 당시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학생들에게 수신, 역사, 지리, 수학, 물리, 법학통론, 헌법대의, 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초대 교장 백이행에 이어, 1910년 교육주지(敎育主旨)를 기독교정신으로 고쳐 나부열 목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맞았으나, 그 후 사정이 생겨 기독교측과의 관계를 끊었다. 오산 학교에는 여준(呂準), 윤기섭(尹琦燮), 이광수(李光洙), 엄상섭(嚴祥燮), 김억(金億), 박기선(朴基璿) 등이 교사로 재직하였다. 학교 출신인 중 주요 인물로는 김소월, 김기석, 주기철 목사 등이 있다.[2]
일제의 탄압
3·1운동 후 이승훈이 체포되자 일제는 독립운동의 본거지라 하여 탄압을 강화하더니 이윽고 교사를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1923년 출감한 이승훈이 김기홍 등 애국지사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재건하고, 발전계획을 추진하던 중 1930년 급서함으로써 모든 계획이 중단되었다.[3]
광복후
그 후 근근이 명맥만을 이어오다가 광복 후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으로 남하하여 1953년 4월 부산시 동구 동대신동에서 오산고등학교로 재건하였다가 같은 해에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짓고 이전하였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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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학교 | 이승훈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오산학교 | 이광수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오산학교 | 김억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오산학교 | 김소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오산학교 | 이중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오산학교 | 105인 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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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2월 |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
1953년 04월 | 오산학교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전하였다 |
시각자료
영상
- 지식채널e - 1907년, 오산학교(게시일: 2013년 1월 22일)
주석
- ↑ "오산학교",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오산학교",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온라인 참조: "오산학교", 한국근현대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오산고등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