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유고
표암유고(豹菴遺稿) | |
대표명칭 | 표암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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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豹菴遺稿 |
저자 | 강세황 |
시대 | 조선 |
목차
정의
내용
표암유고의 내용 구성
권1~3에는 주로 시부(詩賦)가 수록되었다. 권1에 수록된 시는 안산 지역에서 거주하던 시기의 것이고, 권2는 거의 만년작으로 서울에서 생활할 당시에 창작된 것이다. 권3에 들어 있는 시는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시에 차운(次韻)한 것이 절반에 가깝다. 또한 강세황이 1788년 연경에 부사(副使)로 파견되었을 때 그곳의 노정과 청국 인사들과 화운(和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써서 화답하는 시를 지음)한 것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 심사정(沈師正)의 「수묵화죽도(水墨花竹圖)」를 비롯한 여러 화제(畵題)가 수록되어있다. [2]
단원기
강세황은 제자인 김홍도에 대한 기록을 표암유고 속 단원기에 남겼다. “김홍도가 어린 시절부터 내 집에 드나들었다”는 김홍도의 어릴 적 모습부터 , "그(김홍도)의 그림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 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그의 그림도 극찬했다. 김홍도의 외모도 묘사하고 있는데 "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3]
표암유고와 자화상
강세황의 시문집인 『표암유고』는 그의 학문과 사상 및 작품 세계를 알아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여기에는 54세 때 꼼꼼히 자화상을 첨부한 자전(自傳)인 「표옹자지」를 서술하여 남김으로써 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역대 최다를 기록하는 초상화들이 전해지고 있다.[4]
지식 관계망
- 강세황과 김홍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표암유고 | 강세황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강세황 | 김홍도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표암유고 | 김홍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수묵화죽도 | 표암유고 | A는 B에 포함된다 | A dcterms:isPartOf B |
심사정 | 수묵화죽도 | A는 B를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표암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조준호, "표암유고",
『디지털안산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배한철,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생각정거장.
- ↑ 조준호, "표암유고",
『디지털안산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강세황, 『표암유고』, 지식산업사, 2011.
- 논문
- 정은진, 「표암 강세황 한시의 형식과 표현」, 『東方漢文學』37, 東方漢文學會, 2008.
- 崔淳姬, 「豹菴遺稿 解題」, 『정신문화연구』3, 한국학중앙연구원,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