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사건
어우동 사건(於于同一事件) | |
대표명칭 | 어우동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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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於于同一事件 |
시대 | 조선 |
날짜 | 1480년 |
관련인물 | 어우동, 성종 |
관련단체 | 의금부 |
정의
1480년(성종 11), 태강수의 아내인 어우동이 왕실의 종친들과 간통하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다..
내용
전개
종실인 태강수 이동(李仝)의 아내인 어우동이 방산수, 수산수 등 왕실의 종친들, 그리고 어유소ㆍ노공필ㆍ김세적 등의 대신들과 간통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어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 의금부에서 여러 재상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에는 어우동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풍속을 바로잡자는 취지에서 어우동에게 교형(목을 졸라 죽이는 형별)을 내렸다.[1]
의의
성종의 처형 명분은 무엇보다 조선의 사회 풍속과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었다. 조선의 건국 이념으로 수용된 성리학은 15세기 후반 성종 당시까지도 사회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은 듯하다. 남녀 차별 없이 균분상속(均分相續)이 이루어지고, 혼례식을 하면 남자가 여자 집에 일정기간 거주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성종은 조선 전기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힘을 쓰는 한편 성리학의 이념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고 수용하려고 한 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진 '어우동 스캔들'은 성리학의 이념 전파에 걸림돌이 되는 사건이었고, 성종은 시범 케이스로 어우동을 처형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음란한 여인을 극형에 처함으로써 조선의 모든 여성들에게 반면교사로 삼게 하자는 뜻을 확실히 보인 것이었다. [2] 성종은 여기에 더해서 다른 방식의 교화 수단으로 『삼강행실도』중 열녀전의 언해본을 간행하여 보급하도록 하였다.
지식 관계망
- 삼강행실도 언해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어우동사건 | 어우동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태강수 | 어우동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어우동사건 | 조선 성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어우동사건 | 삼강행실도 언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신병주, "어우동", 『인물한국사』. 온라인 참조: "어우동",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병주, "어우동", 『인물한국사』. 온라인 참조: "어우동",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연동원, 「어을우동 事件의 判決過程과 時代的 意味」,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6.
- 김대홍, 「조선시대 於宇同 淫風事件의 全貌와 당시의 法的 論議」, 『法史學硏究』, Vol.- No.44, 한국법사학회, 2011, 143-169쪽.
- 정해은, 「조선전기 어우동 사건에 대한 재검토」, 『역사연구』, Vol.- No.17, 역사학연구소, 2007, 7-29쪽.
- 한규무, 「조선시대 여인상에 대한 오해와 편견 : 황진이·어우동·논개 그리고 맹모를 중심으로」, 『인간연구』, Vol.- No.9,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05, 56-74쪽.
유용한 정보
- 신병주, "폐비 윤씨와 어우동의 공통점…성리학 이념 확립 본보기로 여성 처형", 『매경이코노미』, 작성일: 2015년 05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