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화쟁국사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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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화쟁국사비부 (芬皇寺和諍國師碑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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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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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芬皇寺和諍國師碑趺 |
시대 | 고려시대 |
지정번호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
지정일 | 1979년 01월 25일 |
소장처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3 분황사 |
관련인물 | 원효(元曉) |
관련장소 | 경주 분황사(慶州 芬皇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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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芬皇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 대좌.
내용
크기는 높이 60㎝, 가로 100㎝, 세로 40㎝이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고, 상대·중대·하대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1]
분황사(芬皇寺)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元曉大師)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2]
고려 명종 때에 한문준(韓文俊)이 건립한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세워진 경위는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3] 분황사에 비 받침돌의 비석인 화쟁국사비를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4]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였고,[5] 이를 확인하는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6]이라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7]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 김정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 화쟁국사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화쟁국사비 | 원효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화쟁국사비 | 한문준 |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주석
- ↑ 이강근,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원효",
『두산백과』online . -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두산백과』online . -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두산백과』online . - "원효",
『두산백과』online . -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이강근,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분황사 화쟁국사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