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Encyves Wiki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
대표명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
한자 |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이칭 |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
주소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47호 |
문화재 지정일 | 1962.12.20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서자 | 최치원(崔致遠) |
각자 | 환영(奐榮) |
서체 | 전서(篆書) |
승려 | 혜소(慧昭) |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혜소(慧昭)의 탑비.
탑비
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龜趺)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1]
850년 선사가 입적하고 삼기(三紀, 36년)가 지난 뒤, 헌강왕이 시호를 진감선사라 추증하고, 탑이름을 대공령탑이라 하였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887년 7월에 세워진다.
![]() |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참된 종교(禪宗)를 흠앙하시어 '진감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하시고 탑이름을 '대공령탑'이라 하셨다. 그리고 전각을 허락하여 길이 명예를 전하도록 하시었다.[2] | ![]() |
출처: |
비문
비문에는 염거의 제자인 지선선사 체징(體澄)이 선종 가지산문을 열고 이를 신라 헌안왕과 왕실이 후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서 최초로 남종선을 전래하였을 때에 신라 불교계에서 남종선을 배척하였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3]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원(金薳)과 김언경(金彦卿)이 썼는데, 첫 줄에서 일곱 번째 줄의 '선(禪)'자까지는 해서(楷書)로 김원이 썼고 '사(師)'자 이하는 행서(行書)로 김언경이 썼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4]이라고 평한 바 있다.[5]
가상현실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갤러리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그래프
관련항목
node | relation | node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를 위한 비이다 | 혜소(惠昭)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에 위치한다 | 하동 쌍계사(河東 雙磎寺)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가 비문을 지었다 | 최치원(崔致遠)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가 비문을 썼다 | 최치원(崔致遠)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가 비문을 새겼다 | 환영(奐榮)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로 불려진다 | 사산비명(四山碑銘)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 -의 이름을 지었다 | 헌강왕 |
각주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영성, 교주 사산비명, 209쪽
- ↑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 주요 소장품 검색 상세정보에서 인용.
- ↑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에서 인용.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