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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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韓國學中央硏究院 藏書閣)
"전경 갤러리",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자표기 韓國學中央硏究院 藏書閣
영문명칭 Jangseogak Archives
유형 제도
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하오개로 323


정의

조선 왕실의 전적 및 다양한 한국학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속 한국학 전문 연구기관.

내용

장서각의 역사

조선후기 규장각 역할의 쇠퇴와 장서각으로 그 기능을 회복시키려 하다

조선왕조는 궁궐 안에 전(殿)·관(館)·각(閣) 등을 세우고 많은 전적(典籍)을 모아 왕의 고문(顧問)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세종집현전, 세조홍문관, 정조규장각을 설치하여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고종은 황제로 등극한 이후, 정조 때에 설치된 규장각이 궁내부(宮內府)에 부속되거나 규장원(奎章院)으로 그 지위가 격하되는 등 점점 그 본래의 기능이 쇠미해졌다. 이에 1908년(순조 2)에 그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당시 궁내부 대신 민병석(閔丙奭)에게 규장각·홍문관·집옥재(集玉齋)·춘방(春坊) 및 4사고(四史庫) 등의 서적을 사간동(司諫洞)의 인수관(仁壽館)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서고를 신축하여 황실 도서관(皇室圖書館)으로서 장서각을 창건하고자 하였다.[1]

경술국치로 중단된 장서각 건립계획 그러나 이왕직 장서각이 건립되다

그러나 고종장서각 건립 계획은 경술국치로 일시 중단되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황실령 제34호에 의거하여 황실의 사무를 관장하는 이왕직 관제를 새로이 제정하였다. 이로써 장서각을 건립하려던 고종의 계획은 일시에 이왕직 안의 도서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때 규장각 및 사고의 서적은 모두 황실령에 따라 이왕직 도서과에서 관장할 수 있었다. 이 법령이 실행되기도 전에 '모든 도서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이관시키라.'는 총독의 명령에 의거해서 1911년 3월, 취조국에 강제 접수되었다. 당시 취조국으로 인계된 내역을 살펴보면, 도서가 5,355종 10만 187책이며, 기록류가 1만 1,730책, 주자(鑄字)가 65만 3,921개 71분(盆), 판목(版木)이 7,501장(張), 기타 부속품이 12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왕직에서는 각 군영으로부터 모은 구위대(九衛隊) 수장서와 창덕궁 선원전(璿源殿) 봉안 도서를 취조국에 인계하지 않고 따로 보관하여 두고, 계속해서 새로 구입한 도서 3,528책과 무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에서 이관한 도서 5,519책(4,606책이라는 설도 있음) 등을 선원전에 모아 장서각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장서각은 조선 말기의 혼란기를 거쳐, 1911년 6월 19일 '이왕직 장서각(李王職藏書閣)'으로 건립되었다.[2]

장서각 마침내 건립되다. 그리고 한국학중앙연구원 개원 이전 시기 연혁

이 도서는 1915년에 창경궁 안에 신축된 4층 서고로 이전되었으며, 1918년에 와서야 비로소 새로 지은 서고를 '장서각(藏書閣)'이라 이름하였다. 1937년에는 창경궁 영춘헌(迎春軒) 북쪽에 위치한 이왕직 박물관덕수궁으로 이전하자, 장서각을 이곳으로 옮겼다. 1948년 광복 이후, 미군정청은 이왕직구왕궁 사무청(舊王宮事務廳)으로 개편하여 계속해서 장서각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1950년 6·25동란이 발발하자, 장서각 도서는 소개(疎開)되지도 못한 채 많은 귀중 도서가 일실(逸失)되었다. 그 중 적상산 사고에서 이관되어 온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763권 900책(1,718권 823책이라는 설도 있음)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국가 문서고(國家文書庫)·중앙역사박물관(中央歷史博物館)에 수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55년 장서각의 관리는 구왕궁 사무청으로부터 창경원 사무소로 이관되었으며, 1961년 9월 13일에 이르러 비로소 일반에 공개되어 열람이 허용되었다. 그 뒤 1969년 11월 5일 대통령령 제4263호에 의거하여, 장서각창경원 사무소에서 문화재 관리국으로 이관되었다.[3]

장서각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으로

이후 국학 연구의 총본산을 표방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개원되자, 장서각 도서를 이곳으로 이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1981년 대통령령 제10588호에 의거하여 장서각 도서의 전량이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옮겨졌다. 장서각 건물은 창경궁 안의 옛 자리에 지금도 남아 있다. 이 같은 변천 과정은 [표 1]과 같으며, 이때 인계된 장서각 도서의 내역은 [표 2]에 나타나 있다.[4]

이관 년도 장서기관 근거법령
1908 인수관 고종령
1911.1.9 이왕직 도서과 황실령 34호
1911.3.30 조선총독부 취조국 조발 135호
1911.6.19 이왕직 장서각
1945.11.8 구왕궁 사무청 장서각 미군정 법령 제26호
1955. 창경원 사무소 장서각 대통령령 제1035호
1969. 11.5 문화재 관리국 장서각 대통령령 제4263호
1981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대통령령 제10588호
종류별 종수 책수
한국 본 12,297 42,562
중국 본 1,151 27,313
일본 본 1,431 13,662
고문서류 3,729 5,184(점)
18,608 88,721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장서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집현전 조선 세종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A ekc:founder B
홍문관 조선 세조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A ekc:founder B
규장각 조선 정조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A ekc:founder B
장서각 조선 고종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A ekc:founder B
집현전 홍문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홍문관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규장각 장서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왕직 장서각 장서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장서각 구왕궁 사무청 장서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구왕궁 사무청 장서각 창경원 사무소 장서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창경원 사무소 장서각 문화재 관리국 장서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20년 조선 세종집현전을 건립하였다
1463년 조선 세조홍문관을 건립하였다
1776년 조선 정조규장각을 건립하였다
1918년 조선 고종장서각을 건립하였다
1981년 대통령 령 제 10588호에 의해서 장서각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으로 이관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78602 126.993542 장서각 옛 터가 있다
37.391972 127.05438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송일기, "장서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송일기, "장서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송일기, "장서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송일기, "장서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송일기, "장서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송일기, "장서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장서각 소장 한국학 자료의 정본화를 위한 기초연구(2013년 장서각 학술대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3.
  • 논문
    • 이왕무, 「李王職의 유래와 장서각 소장 이왕직 자료의 沿革」, 『장서각』31,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34-57쪽.
  • 웹자원
    • 송일기, "장서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