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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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9일 (목) 13: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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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李麟佐─亂)
대표명칭 이인좌의 난
한자표기 李麟佐─亂
유형 사건
시대 조선
날짜 1728년 3월 15일
관련인물 조선 경종, 조선 영조, 이인좌, 오명항, 박문수
관련유물유적 난리가



정의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1]

내용

배경

조선 경종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아버지 조선 숙종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頤命)에게 연잉군(延礽君: 英祖)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측은 경종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책봉(世弟冊封)과 세제대리청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측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 등의 과격 소론측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그 명분으로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과 영조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 : 昭顯世子의 曾孫)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2]

경과

1728년(영조 4)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를 거쳐 한양으로 북상하였으나 병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 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박찬신(朴纘新)을 도순무 중군(都巡撫中軍)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난의 토벌에 나섰다. 관군은 1728년(영조 4) 3월 24일 안성·죽산의 반군을 소탕하고, 이인좌·권서봉·목함경(睦涵敬) 등을 생포하였다. 안성·죽산에서의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 초 추풍령을 넘었을 때에는 영남 지방의 반군도 지방 관군에 의해 이미 소탕되었다.[3]

결과

난의 평정에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정국 추이에 그들의 처지를 약화시켜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에 영조 즉위초부터 주창되어온 탕평책의 실시는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4].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갔다. 또한 이때 반군이 군사를 동원한 여러 방식은 뒤의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5]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3.1운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dcterms:isPartOf B
유관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A는 B를 주도하였다 A ekc:performed B

시각자료

주석

  1. 오갑균, "이인좌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민백
  3. 군산문화대전, [네이버 지식백과] 이인좌의 난 [李麟佐-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4. 민백
  5. 두산백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