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
안향(安珦) | |
대표명칭 | 안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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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安珦 |
생몰년 | 1243년(고종 30)-1306년(충렬왕 32) |
본관 | 순흥(順興) |
시호 | 문성(文成) |
호 | 회헌(晦軒) |
자 | 사온(士蘊) |
출생지 | 경상북도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
시대 | 고려 |
대표직함 |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 |
부 | 안부(安孚) |
모 | 강주 우씨(剛州禹氏) 우성윤(禹成允) 딸 |
성격 | 문신, 학자, 문인 |
정의
고려 문신.
내용
생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초명을 유(裕)라고 부르다가 향(珦)으로 개명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과 같아 이를 피하여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따 지은 것이다.[1]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이어서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1272년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해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상주판관(尙州判官)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2]
1289년(충렬왕 15)에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는데 조선후기의 각종 기록에는 이때 원의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교육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국학(國學)의 대성전(大成殿)을 낙성하였으며,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의 초상화와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사(諸子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1304년(충렬왕 30)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고 1306년(충렬왕 32) 9월 12일에 죽었다. [3]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임강서원(臨江書院)을 세웠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4]
성리학의 수용
1289년 11월 안향은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방문했다. 주자(朱子)의 저서를 필사하고 공자의 초상을 모사하여 1290년(충렬왕 16년) 봄에 귀국했다. 이에 따라 1290년을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으로 잡기도 한다. 물론 어느 한 년도를 딱 집어서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이라 말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다. 물건도 아닌 사상의 수용이 정확한 시작점을 지닌다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사실 1290년과 안향 이전에도 기초적이나마 고려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에 관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1298년부터 연경에 10년 간 머무르며 성리학을 공부한 뒤 서적을 갖고 귀국한 백이정(白頤正)의 역할도 중요했다. 백이정은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리하자면 안향, 백이정, 권보, 우탁, 이제현 등으로 이어지는 13세기말~14세기 중반이 성리학 초기 수용기였다. 충목왕 즉위년(1344년)에는 성리학의 핵심 텍스트인 사서(四書)가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초기 성리학의 맥은 다시 이곡, 이색 부자(父子)와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안향은 이러한 흐름의 선구자였다. 백이정의 일생을 정리한 행장에는 그가 권보, 우탁 등과 함께 안향 문하에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제현(1287~1367)은 안향을 그 시대 유학의 으뜸이자 대표 격이라 언급했다. 안향은 이미 자신의 시대에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다.[5]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안향 | 성리학 | A는 B와 관련있다 | |
안향 | 안부 | A는 B의 아들이다 | |
주희 | 안향 | A는 B의 스승이다 | |
안향 | 고려 충선왕 | A는 B의 신하이다 | |
안향 | 고려 원종 | A는 B와 관련있다 | |
안향 | 삼별초의난 | A는 B와 관련있다 | |
안향 | 고려 충선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안향 | 회헌실기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안향 | 문묘 | A는 B와 관련있다 | |
영주 소수서원 | 안향 | A는 B을 배향하였다 | |
연천 임강서원 | 안향 | A는 B을 배향하였다 | |
곡성 회헌영당 | 안향 | A는 B을 배향하였다 | |
안향 초상 | 안향 | A는 B를 묘사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 거리
- 『고려사』열전18, 안향(安珦). 온라인 참조: "안향",
『고려시대사료』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안향", 인물한국사,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덕환, 선비정신의 현대적 실천 방향 모색 -안향의 효와 충 사상을 중심으로-, 선비문화 28, 남명학연구원, 2015, 97-106쪽.
- 안영도, 안향의 성리학 수용 연구, 충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 김기주, 『영남의 학맥 1: 안향에서 주세붕까지』,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윤원현, 회헌 안향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 동서철학연구 35, 한국동서철학회, 2005, 283-300쪽.
- 이동희, "안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문기, 문헌을 통한 안향 관련 유적과 유물의 고증(考證), 동방한문학 38, 동방한문학회, 2009, 221-261쪽.
- 장동익, 안향(安珦)의 생애(生涯)와 행적(行蹟), 퇴계학괴 유교문화 44,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9, 189-222쪽.
- 전재강, 안향의 선비적 면모와 후대적 평가, 대동한문학 14, 대동한문학회, 2001, 223-246쪽.
- 정성식,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주자학(朱子學) 수용과 성격, 동방학 17, 한서대학교 부설 동양고전연구소, 2009, 221-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