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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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금복 (靑衿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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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청금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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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靑衿服 |
이칭별칭 | 청금(靑衿), 청금단령(靑衿團領), 청금원령(靑衿圓領), 청단령(靑團領), 청삼(靑衫) |
구분 | 의복 |
착용신분 | 유생 |
착용성별 | 남성 |
목차
정의
내용
『시경』의 "청청자금(靑靑子衿), 푸른 옷깃의 그대여"라는 시구[2]의 첫 문장에서 유래되었다. 각주에 '금(衿)'은 '영(領)'으로 '옷깃'이다. 성균관의 학생복인 '청금(靑衿)'이라는 명칭은 당(唐)에서 전래된 것으로 국학(國學)의 학생복인 청금복(靑衿服)에서 유래되었으며, 복식 형태는 명(明) 국자감의 청원령(靑圓領)[3]에서 기인 하였다.[4]
왕세자, 왕세손은 입학례 과정 중에 성균관 대성전(成均館 大成殿)에서 작헌의(爵獻儀)를 행할 때 왕세자의 상복인 곤룡포를 벗고 학생복으로 갈아입었다.[5] 1485년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는 성균관 제학생도 학생복의 기본 구성은 복건 형태의 '연건후수(軟巾後垂)'에 청금단령(靑衿團領)이었다.[6]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의 복장과 유사하여 청금복 착용을 기피하게 되어 사복(私服)인 직령(直領)을 착용하였다. 18세기 후반 직령과 도포(道袍)의 착용이 혼재하다가 이후 도포로 정해지는데, 18세기 풍속화와 왕세자입학도 등에 유생의 복식이 직령과 도포로 그려져 있다.[7]
1746년(영조 22) 난삼(襴衫)을 여러 학생들의 방방의에서 착용하는 복식으로 개정하여 청금복과 난삼으로 이분화가 이루어졌다. 1884년 고종의 갑신의제개혁의 후속 조치인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에서 유생의 재복(齋服)은 구제(舊制)를 유지하되 사복(私服)은 착수의(窄袖衣)로 규정하였다.[8]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왕세자 | 청금복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학생 | 청금복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유생 | 청금복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청금복 | 연건후수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한국복식사전:청금복
- ↑ 전관수, 『한시어사전』, 국학자료원, 2007. 온라인 참조: "청금", 한시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太宗實錄』 11년(1411년) 6월 12일: 「成均館及五部儒生, 始着靑衿. 依朝廷之制也.」
- ↑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80쪽.
- ↑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90~91쪽.
- ↑ 『經國大典』 ,「禮典」, '儀章條', "諸學生徒 緇布巾(在學) 團領(儒學用 靑衿) 條兒."
- ↑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242쪽.
- ↑ 정희정,「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242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강효진, 「조선왕실의 왕세자 교육과 그 특징」, 건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손윤혜, 「조선후기 왕세자 입학례 복식 고증」,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손윤혜ㆍ이은주, 「1817년 효명세자 입학례의 왕세자 복식 고증」, 『문화재』 46권 1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 장재천, 「조선시대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 『韓國思想과 文化』 55권,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 홍나영, 「조선시대 儒生服飾의 변천에 관한 연구 –성균관 학생복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1권 3호, 한국의류학회,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