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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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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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
이칭 |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
주소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번지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658호 |
문화재 지정일 | 1979.05.22 |
찬자 | 권근(權近) |
서자 | 천택[1] |
각자 | 미상 |
승려 | 혼수(混修) |
승탑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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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靑龍寺址)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고승 보각국사 혼수(普覺國師 混修)의 탑비.
탑비
전체높이 265.4cm, 비신높이 232.2cm, 너비 115.5cm, 두께 19.6cm.[2]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3]
문인들이 부도 옆에 탑비를 세우기를 계획하고 스님의 제자인 만우로 하여금 행장을 짓게 하고 소안이 이를 갖고 가서 왕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왕이 신 근(권근)에게 명하여 비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 (중략) ... 갑술년 3월 에 문인 선사 희진은 비를 세우고 문인인 선사 xx는 글자를 새기다. | ||
출처: |
이수의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極樂鳥)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 鷰谷寺 東 僧塔, 국보 제53호)이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求禮 鷰谷寺 北 僧塔, 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4]
비문
비문은 손소(孫紹)가 짓고, 문민(文旻)이 새겼으며, 글쓴이는 알 수 없다. 비신이 파괴되어 문헌을 통해서 비문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는 결락이 극심하여 후반부분은 거의 마멸 상태이고,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결락이 심하여 뜻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며,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은 거의 완비한 상태로 되어 있다.[5] 정간(井間)을 치고 쓴 이 비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행서(行書)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초서(草書)도 간간히 나타나며, 또한 결체(結體)에 있어서 약간의 무리와 과장이 여실한 김생(金生)의 독특한 필치를 닮은 글씨들도 섞여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필력이 건경(健勁)하며 아취와 신운(神韻)이 감도는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비하여 서예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걸작이다.[6]
가상현실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갤러리
답사 이후 추가 예정
그래프
관련항목
각주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문화재검색, 문화재청.
- ↑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忠州靑龍寺普覺國師幻庵定慧圓融塔碑)",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문화재청.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문화재검색, 문화재청.
- ↑ 문화재청
- ↑ 이지관
- ↑ [네이버 지식백과]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谷城泰安寺廣慈大師塔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