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중화전
덕수궁 중화전 (德壽宮 中和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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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덕수궁 중화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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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德壽宮 中和殿 |
유형 | 유적건조물,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시대 | 조선 |
지정번호 | 보물 제819호 |
지정일 | 1985.01.08 |
정의
중화전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 내부의 건물이다.
내용
설립경위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이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할 당시에는 이곳 중화전을 짓기 전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현재의 즉조당(卽祚堂)이 태극전(太極殿)이란 이름으로 법전의 역할을 하였다. 이듬해 2월 태극전은 다시 중화전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1902년 현재 중화전의 위치에 중층규모의 중화전을 새롭게 건립했다. 그러나 1904년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현재의 덕수궁 영역이 잿더미가 되면서 옛 모습을 잃고 지금처럼 단층 팔작지붕으로 1906년 재건되었다 이는 당시의 궁핍한 재정상황과 더불어 나날이 쇠락해 가는 대한제국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1]
의의
- 의례공간으로서의 중화전
중화전은 의례공간의 특성에 맞는 건축적 배치와 구성을 갖추고 있다. 말하자면 중화전은 왕조사회의 위계와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 셈이다. 그러한 특징은 중화문에서 중화전에 이르는 조정(朝廷) 마당의 삼도(三道)와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 두 벌의 월대를 설치해 잘 드러내고 있다. 중화전에서 국왕이 참석해 공식적인 행사를 열 때는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관리들이 이곳 월대 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2]
- 대한제국기 비극적 사건의 무대
중화전은 일반적인 궁궐의 법전 용도답게 왕의 즉위식 및 가례식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의식 조하례(朝賀禮)의식 등 공식행사가 거행되는 곳이다. 하지만 중화전은 당시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실상 법전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장소로 남고 만다. 1907년 7월 20일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면서 이곳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개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중화전에서 개최된 양위식에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 것이 친일파들에 의해 ’황제 양위’로 둔갑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달 뒤 8월 27일 일제와 친일파의 각본에 의해 돈덕전(惇德殿)에서 순종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고 만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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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연시 무동 각 정재 무도 홀기 | 덕수궁 중화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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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 경운궁이라는 정식 명칭이 붙여졌다. |
1897년 | 경운궁의 명칭이 태극전으로 변경되었다. |
1904년 | 태극전의 명칭이 덕수궁 중화전으로 변경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