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애왕
신라 경애왕(新羅 景哀王) | |
대표명칭 | 신라 경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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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新羅 景哀王 |
생몰년 | -927년 |
이칭 | 박위응(朴魏膺) |
시대 | 신라시대 |
국적 | 신라 |
부 | 신라 신덕왕 |
모 | 의성왕후 |
자녀 | 금성대군 박교순(朴交舜) |
전임자 | 신라 신덕왕 |
후임자 | 신라 경순왕 |
정의
신라 제55대왕.
내용
경애왕은 917년(경명왕 1) 형인 경명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이찬의 직위에 있으면서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김성(金成)에게 상대등의 자리를 넘겼으며, 924년(경명왕 8) 음력 8월에 경명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1]
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王建)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康州)의 왕봉규(王逢規)가 관할하는 돌산(突山)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2] 음력 정월 왕건이 직접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를 공격하자 경애왕은 군사를 보내 그를 도왔다. 그러자 후백제는 음력 9월 대대적으로 반격을 시작해 근암성을 함락시키고 고울부도 점령했다. 경애왕은 고려로 원병을 청해 후백제의 침공을 물리치려 했으나, 견훤은 고려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기습해 경애왕을 죽였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경애왕이 왕비와 후궁,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느라 적병이 쳐들어오는지도 몰랐으며, 견훤의 군영으로 잡혀간 뒤에 위협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왕비와 비첩들도 견훤의 부하들에게 능욕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경애왕을 죽인 견훤은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로 경애왕에게는 이종사촌이 되는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이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경애왕의 시신을 수습해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매장했는데, 오늘날 경주시 배동에 위치한 경주 경애왕릉은 사적 제222호로 지정되어 있다.[4]
한편, 경애왕 때에 황룡사에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설치하고 선승(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5]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신라 신덕왕 | 신라 경애왕 | A의 아들은 B이다 | A ekc:hasSon B |
신라 경애왕 | 신라 경명왕 | A는 B의 형제이다 | A ekc:hasBrother B |
신라 경애왕 | 견훤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라 경애왕 | 경주 황룡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주석
- ↑ "경애왕",
『두산백과』online . - ↑ 김두진, "경애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경애왕",
『두산백과』online . - ↑ "경애왕",
『두산백과』online . - ↑ 김두진, "경애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