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 |
|
관련개념 | 경제개발 5개년계획 |
---|
정의
1968년 4월부터 4년동안 추진된 농어민 소득 증대를 위한 사업.
내용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은 새마을운동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이후 농어촌개발공사 설립안을 작성, 후임 장관의 결재를 받아 1968년 2월에 발족시켰다.
공사 설립 후 새마을공장과 농어민들을 연결시켜주는 사업으로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계획’을 기안하여 김영준(金榮俊) 장관에게 보고한 후 다음날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첫째, 농림부 단독으로 농어민 소득증대 방안을 추진할 경우 사업규모가 적을 수밖에 없으니 내무부, 보사부, 경제기획원 등을 망라하여 사업계획을 확대하고 부처 간 지원협의회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둘째, 사업계획이 전적으로 정부의 지원사업만으로 계획되어 있으니 농어가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농어민들도 다소나마 자기 돈이 들어가야 더욱 열심히 하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20% 가량을 자기부담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자기부담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가족 노동력’을 평가하여 자기부담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대통령의 지시가 농특사업의 성공요인이자 그 후 새마을사업의 기초정신이다.
셋째, 선정되는 작물은 바로 시장에 나가면 팔릴 수 있도록 판로를 확실히 챙겨야 한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잠업, 양송이, 젖소, 비육우, 후지사과, 제주도의 키 작은 감귤 등 ‘현금작목’ 32개가 선정됐다. 이들 많은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성공을 거둔 사업이 비닐하우스 사업이다. 일본 농촌의 비닐하우스 재배를 보고 우리나라에 최초로 이를 보급했다. 작품에 묘사된 비닐하우스는 특용작물 재배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농어민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1] 또한 조립식 비닐하우스의 설치는 경운기 등의 농기계 보급과 더불어 근교 농업의 기업화를 촉진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2]
농특사업은 1968년 4월부터 착수하여 1년 뒤 1969년부터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농특사업성공사례 경진대회를 개최했다. "농어민 소득증대 경진대회"도 정기적으로 열려 사업에의 참여의식을 고취함과 동시에 사업 성과와 계획 등을 홍보하기도 하였다.[3]
이때까지만 해도 새마을운동이란 용어는 없었다.
농특사업은 1968년부터 4년 계획으로 추진되어 농어촌 가구당 평균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의 70% 수준에서 계획기간이 끝난 뒤에는 120%로 높아졌다.
개곡리 사진 ▲ 박정희 대통령이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하사용씨에게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iframe width="854" height="480" src="https://www.youtube.com/embed/efXLbDQpk3A"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농협 공식 유튜브 채널 게시일: 2017. 5. 4. 구독 1.5천
SUBSCRIBE SUBSCRIBED UNSUBSCRIBE그때그시절 - 번영하는 우리조합 5 -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 ↑ "朴大統領, 農民所得增大에 지시 “特用作物 짓게 支援", 『동아일보』, 1970년 11월 6일.
- ↑ "朴大統領 지시 “近郊 농업 企業化", 『동아일보』, 1971년 4월 8일.
- ↑ "2회 農漁民所得증대 競進大會", 『동아일보』, 1970년 1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