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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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明成皇后)
대표명칭 명성황후
한자표기 明成皇后
지위/역할 왕비, 추존 황후
이칭/별칭 명성왕후(明成王后), 민비(閔妃)
재위기간 1866-1895(음)
출생사망 1851년-1895년 8월 20일(음)
능묘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홍릉(洪陵) 37.631906, 127.211094
배우자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高宗)
자녀 4남 1녀, 순종(純宗)
부친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
전임자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 金氏)
후임자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정의

고종의 비로, 순종의 어머니이다. 생전에 왕비였는데, 일본에게 살해당한 뒤 고종황제가 될 때 황후로 추존되었다.

내용

생애

명성황후는 여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서울 감고당(感古堂)에서 왕비가 될 때까지 살았으므로, 유년기에는 도시와 농촌을 고루 체험하였다.[1] 1866년(고종 3)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에 책봉되었다.[2] 고종이 친정을 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의 집에서 폭약이 터져 어머니 및 아들과 함께 죽었는데 이 배후에 흥선대원군이 있다는 의심이 있었다. 이후에는 친척인 민겸호(閔謙鎬), 민규호(閔圭鎬) 등을 가까이 하여 민씨척족 세도의 원인이 되었다.[3] 명성황후는 개항으로부터 임오군란(壬午軍亂), 서구 열강과의 조약, 갑신정변(甲申政變), 동학운동 등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순간에 주역 또는 조역처럼 언급되었다.[4] 따라서 임오군란 등의 사건에서 공격의 표적이 되어, 죽은 것으로 처리되는 일도 있었다.[5] 일본과의 갈등 속에서 1895년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당하였는데,[6] 이때 폐서인이 되었다가[7] 다시 위호(位號)가 회복되는 과정이 있었다.[8]

사후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였는데, 이것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9] 고종황제가 될 때 황후에 책봉되었다.[10]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에 고종명성황후의 능이인 홍릉(洪陵)이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유릉(裕陵)과 함께 사적 제 204호로 지정되었다.[11]

거행 의례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12],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지식 관계망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종 명성황후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명성황후 왕비 A는 B에 해당한다 A dcterms:type B
명성황후 책례 A는 B를 거행하였다 A ekc:participates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866년 3월 20일 명성황후왕비책례를 거행하였다

공간정보

공간 내용
창덕궁 인정전 명성황후왕비 책례를 거행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효형출판, 2006, 22~23쪽.
  2. 『高宗實錄』 3년(1866) 3월 己卯: 「二十日詣仁政殿行冊妃禮」
  3. 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효형출판, 2006, 29쪽.
  4. 이민원, 「근대의 궁중 여성 – 명성황후의 권력과 희생 -」, 『史學硏究』 77, 한국사학회, 2005, 85쪽.
  5. 『高宗實錄』 19년(1882) 6월 甲子: 「敎曰」
  6. 『高宗實錄』 32년(1895) 8월 戊子: 「二十日卯時王后崩逝于坤寧閤」
  7. 『高宗實錄』 32년(1895) 8월 庚寅: 「二十二日詔曰」
  8. 『高宗實錄』 32년(1895) 10월 丁丑: 「初十日詔曰」
  9. 『高宗實錄』 33년(1896) 2월 11일(양력): 「十一日上與王太子移蹕駐御于大貞洞俄國公使館」
  10. 『高宗實錄』 34년(1897) 10월 12일(양력): 「十二日行告天地祭」
  11. "남양주 홍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문화재청.
  12.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규장각』online,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3. "홍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고종실록』
  • 『매천야록』
  • 강상규, 「명성왕후와 대원군의 정치적 관계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40-2, 한국정치학회, 2006.
  • 김영수,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대원군의 침묵과 명성황후암살의 배후」, 『梨花史學硏究』 39, 이화여자대학교 사학연구소, 2009.
  • 김창겸, 김선주, 권순형, 이순구, 이성임, 임혜련, 『한국 왕실여성 인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 민덕식,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어필(御筆)」, 『忠北史學』 25, 충북대학교 사학회, 2010.
  • 박계리, 「「명성황후 발인반차도」와 발인 행렬」, 『美術史學報』 47, 미술사학연구회, 2016.
  • 서영희, 「명성왕후 재평가」, 『역사비평』 60, 역사문제연구소, 2002.
  • 이민원, 「근대의 궁중 여성 - 명성황후의 권력과 희생 -」, 『史學硏究』 77, 한국사학회, 2005.
  • 이배용, 「개화기 명성황후 민비의 정치적 역할」, 『국사관논총』66, 1995
  • 張暎淑, 「서양인의 견문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과 역할」, 『한국 근현대사 연구』 35, 한국군현대사학회, 2005.
  • 지두환, 『고종황제와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한영우, 『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효형출판, 2006.

더 읽을거리

  • 정숭교, 명성황후, "명성황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1월 22일.
  • "명성왕후",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명성황후생가",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문화재청.</ref>
  • 김정미, [1]",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네이버, 작성일: 2011년 3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