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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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DH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26일 (화) 10:51 판 (새 문서: {{인물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 김지남 |한자표기= 金止男 |영문명칭= |본관= 광산(光山) |이칭= |시호= |호= 용계(龍溪) |자= 자정(子...)
김지남(金止男) | |
대표명칭 | 김지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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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金止男 |
생몰년 | 1559-1631 |
본관 | 광산(光山) |
호 | 용계(龍溪) |
자 | 자정(子定)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용계유고 |
대표직함 | 집의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가족관계
순성(順誠)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영동현감 표(彪)이다. 재종숙 양(讓)에게 입양되었다.
사회적 위치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593년 정자가 된 데 이어, 지제교·수찬·교리·응교·정언·사간·장령·집의·필선·보덕·승지, 예조·병조·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행주판관, 경기·평안·전라·강원도의 도사를 거쳐서 경상감사 및 남양·순천·상주·청풍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사건
1613년(광해군 5) 집의로 있을 때, 박응서(朴應犀)의 무고로 영창대군을 죽이자고 주장하는 지평 정호관(丁好寬)을 면박했고, 인목대비를 폐하려는 이이첨(李爾瞻) 일당에 반대하면서 그 죄상을 폭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 임명된 조신들이 외직에서 모두 파직되었으나 특별히 유임되었다.
주석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端宗 2(1454)
- 『조선도서해제(朝鮮圖書解題)』, 京城: 朝鮮總督府, 大正8[1919]
-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京城: 朝鮮總督府 中樞院, 1937
- 『태종실록(太宗實錄)』, 世宗 13(1432)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인조실록(仁祖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