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민애왕
신라 민애왕(閔哀王) | |
대표명칭 | 신라 민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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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閔哀王 |
생몰년 | 817-839 |
이칭 | 김명(金明) |
배우자 | 영공(永公)의 딸 윤용부인(允容夫人) 김씨 |
부 | 김충공(金忠恭) |
모 | 귀보부인(貴寶夫人) 박씨(朴氏) |
전임자 | 희강왕 |
후임자 | 신무왕 |
정의
신라 제44대 국왕.
내용
개요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김명(金明)이다. 아버지는 뒤에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봉해진 김충공(金忠恭)이고, 어머니는 선의태후(宣懿太后)로 봉해진 귀보부인(貴寶夫人)박씨(朴氏)이다. 비(妃)는 각간(角干) 영공(永公)의 딸 윤용부인(允容夫人) 김씨이다. 민애왕은 희강왕(僖康王)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의 군사력에 의탁한 김우징(金祐徵)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1]
즉위 과정
김명은 희강왕이 되는 김제륭(金悌隆)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해 왔다. 흥덕왕(興德王)이 죽자 그 사촌 동생인 김균정(金均貞)과 5촌 조카인 김제륭(김균정과는 삼촌 간)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 때 시중(侍中) 김명과 아찬(阿飡) 이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金祐徵)과 조카 김예징(金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시기의 왕위계승 분쟁은 김제륭(희강왕)-김명(민애왕)의 제휴세력과 김균정-김우징(신무왕) 부자 사이의 대립이었다. 이는 원성왕의 아들 중 인겸계(仁謙系)와 예영계(禮英系)의 다툼이자 좁게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충공, 김헌정(金憲貞), 김균정 가계 사이의 분쟁이었다.[2]
이 싸움에서 김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에 맞아 김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의 장보고에게 도망해 의탁하였다. 김균정-김우징 세력이 타도된 이후 김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실질적인 정치의 주도권은 김명-이홍에게 있었다. 그래서 희강왕에게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라 민애왕이 되었다.[3]
퇴위
민애왕은 즉위하자마자 곧장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김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명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해 진격해 왔다.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해적(海賊)을 토벌하고자 한다는 청원을 하여 승낙받음으로써 지금의 완도(莞島)인 청해에 진(鎭)을 설치하기에 이르렀고, 해상무역을 통한 경제력과 아울러 1만에 달하는 강한 군사력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신라 혜공왕(惠恭王) 이후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진 신라 국내 정황과 당(唐)의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 당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신라와 당 사이의 해상무역(海上貿易)을 독점하며 세력을 키워왔던 것이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청해진세력에 의탁하여 민애왕을 내쫓고 왕이 되고자 하였다. 이때 청해진에서 김양·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 장수들이 김우징을 받들고 있었다.[4]
그 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해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 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했으나 패배하고, 다음 해인 839년 1월 달벌(達伐: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그러자 민애왕은 월유댁(月遊宅)으로 황급히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장지(葬地)는 알 수 없다. 현재 경주에는 민간에 민애왕릉(閔哀王陵)이라고 전해 오는 왕릉이 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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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익, "충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종익, "충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종익, "충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종익, "충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종익, "충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