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
대표명칭 | 대동여지도 |
---|---|
한자표기 | 大東輿地圖 |
유형 | 지도첩 |
저자 | 김정호 |
편자 | 김정호 |
저술시기 | 1861년 |
시대 | 조선 |
수량 | 22첩 |
판본 | 목판본 |
소장처 | 서울역사박물관,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청구기호 | 보물 |
지정번호 | 제850-1호 |
지정일 | 1985년 8월 9일 |
목차
정의
1861년(철종 12) 김정호(金正浩)가 편찬·간행하고 1864년(고종 1)에 재간한 분첩절철식(粉帖折疊式)의 전국 지도첩.[1]
내용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으로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하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이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2]
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3]
또 대동여지도에는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4]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 그의 첫 번째 역작인『청구도』2책을 제작한 이후 1840년대까지 이용의 편리에 초점을 맞춰 3번에 걸쳐서 개정판『청구도』를 지속적으로 제작하였다.『청구도』에 수록된 기본 정보는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이 약 4.1㎝의 20리 눈금선[方眼] 체계를 기초로 제작한 고을지도책을 1776년(정조 원년)에서 1787년(정조 11)년 사이에 이용의 편리를 위해 재편집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해동여지도』3책 계통과 동일하다.
1850년대에는 분량이 적어 휴대와 이동에 편리한『청구도』의 책 형식을 버리고 동서와 남북의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춘 병풍식(또는 절첩식)의 첩 형식을 채택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사본의『대동여지도』14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대동여지도』18첩, 필사본의『동여도』23첩을 순서대로 제작한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대동여지도』18첩부터 산줄기, 물줄기, 해안선, 지명의 위치 등 기본 정보의 대대적인 교정이 나타나며, 필사본의『동여도』23첩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와 같은 교정은 기존의 거의 모든 지도와 지리지에 수록된 정보를 장기간 동안 체계적으로 비교·검토하여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다. 김정호 스스로도 자신의 지도를 전체적인 흐름에서 이해해야지 100%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용하면 안 된다는 문구를 남겨 이용자들에게 지도의 한계를 미리 알려주었다.
실제로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틀렸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틀린 부분을 찾기가 어렵지 않으며,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한 서울 부근에서도 틀린 부분이 발견된다. 1861년에 제작된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의 기본 정보는 필사본의『동여도』23첩과 동일하면서 지명의 수가 1만 8000여 개에서 1만 1000여 개로 줄어들고 산줄기와 기호의 표시 방법이 달라지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다.『동여도』는『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위해 제작된 선행지도였다고 생각된다.
[내용]
먼저, 휴대와 이동보다는 동서와 남북의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①이어보기에 편리하도록 지도 각 면의 외곽 부분에 여백을 없앴다. 이 때문에『청구도』의 외곽 여백에 표시된 10리 간격의 축척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1층의 가장 앞쪽에 가로와 세로 각각 80리와 120리의 눈금선표를 수록하여 축척의 기능을 대신하게 하였다.
②『청구도』는 전국을 29층 22판으로 나눈 최고 수준의 찾아보기지도[索引圖]를 가장 앞쪽에 배치하고 지도의 각 면 외곽에 층판의 번호를 적어놓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에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춘『대동여지도』는 지도 각 면의 외곽에 층판의 번호를 적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각 첩의 표지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써주는 방식을 채택하여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많이 찍어내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목판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났다. ①판각의 어려운 때문에 채색필사본인『동여도』의 1만 8000여 개의 지명보다 7,000여 개가 적은 1만 1000여 개의 지명만 수록하였다. ②흑백으로만 찍어내야 했기 때문에 현대 지도의 범례(凡例)에 해당되는 지도표(地圖標)의 기호가『동여도』의 26개에서 22개로 줄어들었다. ③물줄기·산줄기·해안선이 판각에 쉽도록 단순화 하였으며, 채색필사본의『동여도』가 산줄기를 화려하게 그린 반면, 무덤의 명당 지도인 산도(山圖)에서 물이 흐르듯 이어서 그리는 산줄기의 표현을 도입하였다.
마지막으로, 그 밖의 특징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①『청구도』가 지도와 지지(地誌)의 결합을 추구한 반면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은 철저하게 지도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제작되었다. 김정호는 전국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이것에 걸맞게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제작해 왔다. 따라서 철저하게 지도적 속성이 강한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은 함께 이용할 수 있는『대동지지(大東地志)』15책의 편찬을 전제로 제작되었다.
②『청구도』에서는 한양으로부터 전국 모든 고을까지 실제로 가는 거리를 고을 중심지 부근에 적어주었던 반면에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에서는 도로 위에 10리마다 짧은 사선을 그어 지도 평면 위의 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가는 거리를 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짧은 거리를 알고자 할 경우에는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에서 사용한 방법이 유리하고 먼 거리를 알고자 할 경우에는『청구도』에서 사용한 방법이 유리하였다.
[의의와 평가]
지도의 제작이란 측면에서 김정호의 궁극적인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지도책의 제작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희망은 지도의 제작뿐만 아니라 이용과 교정 및 필사 부분까지 세밀하게 고려한『청구도』에서부터 풍부하게 담겨 있는데, 한 번에 많이 찍어낼 수 있는 목판본『대동여지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실현되었다. 김정호에게 지도의 정확성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항시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편리였다.
평면 위의 직선거리가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구불구불 실제로 가는 거리 정보를 기초로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삼각측량이나 경위도 측정에 기초하여 제작된 근대지도의 정확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김정호의 지도에는 현재의 10만 : 1 도로지도 등 많이 이용되는 것을 전제로 제작된 근·현대의 대중적 지도책에 담겨 있는 아이디어가 거의 모두 담겨 있다. 이용의 문제만을 고려한다면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은 지도사적 가치로 보아 이미 근대를 뛰어넘은 지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대동여지도 |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 ↑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 ↑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단행본
- 조정래, 『아리랑 1: 조정래 대하소설』, 해냄, 2001, 235쪽.
- 윤병석,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 1994, 291쪽.
- 기사
- 강신철, "민족기록화 대부분 사실과 달라", 『경향신문』, 작성일: 1980년 02월 26일.
- 김태완, "항일(抗日)과 친일로 이어진 명성황후 후손들의 120년 영락", 『월간조선』, 작성일: 2015년 10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