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장의사
서울 장의사 (서울 藏義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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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서울 장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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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서울 藏義寺 |
이칭 | 장의사(莊義寺)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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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
내용
659년(무열왕 6)에 황산벌싸움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춘랑(長春郎)과 파벌구(罷伐九)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하였다.[1] 고려시대 1027년(현종 18)에는 장의사와 인근 사찰에서 당시의 금령을 어기고 술을 주조하여 처벌되기도 했지만, 예종, 인종, 의종 등 역대 왕들이 절에 행차하는 등 높은 위상을 가졌다.[2]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정비(正妃)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기신제(忌晨祭)를 이 절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 뒤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 사세를 떨치게 되었다. 태종의 첫 기재가 장의사에서 설행되었으며,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초재(初齋) 또한 장의사에서 열렸다.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장의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세조는 왕비와 함께 장의사에서 법회를 열었고, 성종대에도 왕실의 기재를 장의사에서 설행한 사례가 종종 보이며 홍문관 관원들의 독서당(讀書堂)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연산군대 초반에도 왕이 장의사에서 수륙재를 거행하고 절의 중수를 위해 군사를 보내는 등 매우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생모의 복위 문제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면서 불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즉 도성 내의 주요 사찰과 양종 도회소가 철폐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왕명에 의해 장의사는 비워졌고 불상도 삼각산의 절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어 장의사 앞에 이궁(離宮)을 만들면서 화단 조성을 위해 장의사를 철거하였다. 17세기에는 장의사 터에 총융청(摠戎廳)이 세워졌다.[3]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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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유 | 서울 장의사 |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 A edm:isRelatedTo B |
탄문 | 서울 장의사 |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 A edm:isRelatedTo B |
삼십육사 | 서울 장의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서울 장의사 | 황산벌싸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서울 장의사지 | 서울 장의사 | A는 B의 터이다 | A edm:isRelatedTo B |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 | 서울 장의사지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각자료
주석
- ↑ 김상현, "장의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용태, "장의사(藏義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용태, "장의사(藏義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