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총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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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장동룡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20일 (수) 12:46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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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총관부
(耽羅摠管府)
대표명칭 탐라총관부
한자표기 耽羅摠管府
유형 제도



정의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가 제주도에 설치한 관청.

내용

삼별초

탐라의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한 직후인 1273년(원종 14) 6월에 두어졌던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가 개편된 것으로, 본래 이름은 탐라국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이다. 설치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에서 탐라국다루가치를 임명한 예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임이 확실하다. 관리로는 원나라에서 다루가치가 파견되었다.[1]

Quote-left.png 윤6월 병진 탐라유진장군(耽羅留鎭將軍) 송보연(宋甫演)이 적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의 시신을 찾았다고 보고하였다. 또 수색하여 적장(賊將) 김혁정(金革正)과 이기(李奇) 등 70여 인을 체포하여 홍차구(洪茶丘)에게 보냈는데, 홍차구가 모두 죽였다. 원(元)이 탐라(耽羅)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을 설치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원이 탐라에 다루가치를 설치하다", 고려사 원종14년 윤6월,『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국사편찬위원회.


목재와 목마장

총관부의 장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에는 몽고족의 인물이 파견되었지만 그 휘하 관원에는 제주의 토착 세력이 임명되어 원의 지배를 방조하였다. 탐라총관부는 제주도를 장악하며 조선용 목재를 징발하고 말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목마장을 다수 개발하였다. 원의 목마장은 충렬왕 2년 총관부의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이 몽고말 160필을 서귀포시(구 남제주군) 성산읍의 수산평에 방목함으로써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후 전 지역으로확산되었다.[2]

변천과정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10년(1284) 탐라국안무사(耽羅國安撫司)로 개칭되었다. 이후 일본 정벌에 집착하던 원의 세조가 1294년(충렬왕 20) 세상을 떠나자 고려가 원에 요청하여 탐라를 환속받았으나, 충렬왕 26년(1300)에 다시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였다.[3]
충렬왕 27년(1301) 이를 탐라군민만호부(탐라만호부)로 개편되었으며, 이후에는 변함이 없다가 반원정책이 단행되는 1356년(공민왕 5) 폐쇄되었다. 탐라만호부로의 개편은 고려가 탐라총관부를 혁파하고, 합포의 진변만호부 등과 같은 예에 의할 것을 원에 요청해 이루어졌다.
한편, 탐라총관부가 원의 직접 지휘를 받았던 반면에, 탐라만호부는 고려왕이 장관인 정동행성 관할하에 두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탐라총관부 A는 B가 설치하였다 A ekc:founder B
탐라국초토사 탐라총관부 A는 B의 전신이다 A ekc:isOldNameOf B
탐라총관부 탐라만호부 A는 B의 전신이다 A ekc:isOldNameOf B
탐라총관부 삼별초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탐라총관부 목호의 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이익주, "탐라총관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탐라총관부", 『두피디아』online, 두산백과.
  3. 김일우, "탐라총관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일우, "탐라총관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이익주, "탐라총관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일우, "탐라총관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탐라총관부", 『두피디아』online,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