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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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李景奭)
대표명칭 이경석
한자표기 李景奭
생몰년 1595(선조 28)-1671(현종 12)
본관 전주(全州)
시호 문충(文忠)
백헌(白軒)
상보(尙輔)
시대 조선
이유간(李惟侃)
대호군(大護軍) 한량(漢良)의 딸 개성고씨(開城高氏)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가계

이경석은 정종의 열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대손이며, 함풍수(咸豊守) 이계수(李繼壽)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수광(李秀光)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대호군(大護軍) 고한량(高漢良)의 딸이다.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은 그의 형이다. 부인은 전주류씨(全州柳氏) 류색(柳穡)의 딸이다.[1]

삼전도비문

이경석은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 때 대사헌·부제학으로서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이듬해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비문을 완성한 후, 그는 형(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삼전도비문에 대해 당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에서는 청나라에 아첨한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등 특히 사후에 심한 논란거리가 되었다.[2]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 화첩

이경석과 관련된 문화유산으로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 화첩(李景奭 几杖 및 賜几杖 宴會圖 畵帖, 보물 제930호)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70세가 넘는 신하에게 공경의 뜻으로 나라에서 지팡이 '장(杖)'과 의자 '궤(几)'와 가마 등을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1668년(현종 9) 11월 왕이 당시 원로대신이었던 이경석에게 공경의 뜻으로 내린 궤 1점과 장 4점 그리고 이를 받는 장면을 그린 그림 1점 등 총 6점의 유물이다.[3]

활동

어려서부터 형 이경직(李景稷)에 학문을 익혔고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 161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고,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宰臣)에 들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주화파(主和波) 대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아 국왕을 섬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여 전쟁이 끝나자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승전을 기념하는 굴욕적인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썼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이경직은 이일로 글을 배운것을 한탄하였다. 1637년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1641년 이사(貳師)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淸帝)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1644년(인조 22)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0년(효종 1) 김자점의 밀고로 조선의 반청정책(북벌정책)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모든 일은 영의정의 책임이라고 자임하고 나섰다. 효종이 청나라 조사관에게 간청하여 처형은 면했으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3년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668년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几杖)을 현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 등 존명사대의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을 작성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난국을 극복한 탁월한 재상이었으며 일생동안 검소하고 소박한 청백리의 삶을 살았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문집에 《백헌집》이 있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4]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이경석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구례 화엄사 벽암대선사비 이경석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김제 금산사 소요당대사비 이경석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금강 표훈사 허백당대사비 이경석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서울 삼전도비 이경석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인평대군묘및신도비 이경석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이경석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 화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주석

  1. 김성준, "이경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원명, "이경석", 『디지털용인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 화첩",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4. "이경석",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2017년 03월 16일 확인.

참고문헌

사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백헌집(白軒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단행본

  • 이성무, 『영의정의 경륜』, 지식산업사, 2012.

논문

  • 강혜선,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삶과 시세계」,『한국한시작가연구』Vol.10, 2006, 127-159쪽.
  • 송강호, 「삼전도 대청황제공덕비의 연구: 만한문 대역을 중심으로=삼전도 대청황제공덕비연구」, 『만주연구』Vol.11, 2011, 293-358쪽.
  • 이상배, 「병자호란과 삼전도비문 찬술」,『강원사학』Vol.19, 2004, 85-122쪽.
  • 이은순, 「이경석(李景奭)의 정치적생애와 삼전도비문시비(三田渡碑文是非)」,『한국사연구』Vol.60, 1988, 57-102쪽.
  • 이은순, 「이경석의 국정운영과 대외 시국인식」,『조선시대사학회』Vol.29, 2004, 105-136쪽.

웹자원

사료 및 자료

사전류

  • "이경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경석", 『두산백과』.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이경석", 『인명사전』, 2002.
  • "이경석(1595년)", 『위키백과』
  • "이경석", 『디지털용인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경석", 『디지털성남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