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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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金基昶)
"김기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김기창
한자표기 金基昶
영문명칭 Kim Ki-chang
생몰년 1913년 2월 18일-2001년 1월 23일
출생지 서울
운보(雲甫)
국적 대한민국
분야 동양화가


정의

대한민국 동양화가

내용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7세에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청각을 상실하였다.
1930년 17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가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널뛰기를 소재로 한 <판상도무(板上跳舞)>로 입선였다. 이때 어머니가 운포(雲圃)란 아호를 주었다. 이후 연이어 입선과 특선을 하였고, 이후 두 차례 조선총독상을 수상하였다.
일제강점기 김기창의 작품은 스승 김은호의 화풍을 수용한 일본화풍이 가미된 사실적 채색인물화 중심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호를 '포(圃)' 자에서 사각의 굴레 같은 '口'를 벗겨 운보(雲甫)로 바꾸었으며, 1946년에는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박래현과 결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일제의 잔재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은 동양화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활동을 보여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채색과 사실 위주의 화풍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여 수묵담채와 서구의 조형원리를 원용한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박래현과 함께 큐비즘의 대상해석 방식을 시도한 작품들과 1960년대 완전히 추상적인 경향을 보이는 작품들, 그리고 1967년 미국과 멕시코 등을 돌아본 후 강렬하고 격정적인 필치와 색채로 제작한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부인 박래현과 1947년 첫 번째로 가진 부부전은 십여 차례에 걸쳐 계속되어 두 사람은 '동지'로서 서로를 격려하며 작품을 계속하였는데 위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그 결실이라 할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로 군산에 피난했던 시절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모습에 한복을 입은 《예수의 일생》 연작 30점을 그려 새로운 종교화의 형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76년 부인 박래현과 사별 이후에는 독창성 있는 자신의 양식을 새로이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인간과 회화의 순수함을 바탕에 두고 소박하고 자유로운 필치를 담은 화면의 이른바 ‘바보산수’ ‘바보화조’가 그것이다. 이는 1980년대 들어 전통기법의 산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해학적 분위를 담은 '청록산수'와 민화풍의 화조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청록산수는 다작과 반복적인 표현으로 매너리즘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81년 방문한 파리 근교 지베르니의 '모네의 집'에서 인상을 받은 그는 충북 청원에 '운보의 집'을 짓고 그곳에서 창작과 함께 만년을 보냈다.

김기창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비판적이었던 작가들과 '백양회'를 결성해 활동하고, 김은호의 문하생 모임인 후소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홍익대학교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만 원 권 지폐의 세종대왕상과 김정호 표준영정, 을지문덕 표준영정 등의 영정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는 청각장애우를 비롯한 장애우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 초대회장을 맡았고,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했다.

한편 그는 친일활동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1942년에는 일제의 정책과 전시체제를 지원하는 '반도총후미술전', '조선남화연맹전', '애국백인일수전람회' 등에 참여하였다. 또한 조선 청년의 강제 징집을 고무하는 시화연재물인 「님의 부르심을 받고」의 삽화를 그리는 등의 친일행위로 『친일인명사전』(2009)에 포함되었 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그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학력

  • 1927 승동보통학교 졸업
  • 1930 이당(以堂) 김은호 사사(師事)
  • 1988 세종대 명예문학박사

경력

  • 1940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 1947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 1954 홍익대 미술학과 전임강사
  • 1955 국전 심사위원, 부위원장, 운영위원 (~79)
  • 1962 수도여사대 교수 및 회화과장
  • 1970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및 고문
  • 1979 한국농아복지회 회장
  • 1982 제1~2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전시

  • 1957 현대한국화 초대전, 뉴욕 월드하우스화랑
  • 1960 현대한국화가 중국전, 대만, 대남, 홍콩
  • 1963 상파울로비엔날레. 한·일·태 3개국 3인전, 스위스
  • 1968 세계문화자유초대전
  • 1971 프랑스 한국현대회화제
  • 1973 한국현역화가 100인전, 국립현대미술관
  • 1980 서도 50년 기념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
  • 1985 현대미술 4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 1986 한국화 100년전, 호암갤러리
  • 1988 국제현대회화전, 국립현대미술관
  • 1991 한국근대미술 명품전, 호암갤러리
  • 1993 팔순기념 회고전, 예술의전당
  • 1994 서울국제현대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 2002 바보 천재 운보 그림전, 국립현대미술관

수상

  • 선전 입선 및 특선 각 연4회
  • 제16회 선전 창덕궁상, 제17회 선전 총독상
  • 1963 5월문예상
  • 1971 3·1문화상
  • 1977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 1981 국민훈장 모란장
  • 1982 중앙문화대상 대상
  • 1983 대한민국예술원상
  • 1986 5·16민족상(사회부문), 서울시문화상(미술부문)
  • 1991 인촌상
  • 1996 의제 허백련 미술상
  • 2001 금관문화훈장 추서

지식 관계망

임시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기창-명량대첩 김기창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강대운 서울대학교 A는 B를 졸업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강대운 대한민국미술대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대한민국전람회 대한민국미술대전 A는 B의 전신이다 A ekc:isOldNameOf B
강대운 인상파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한국미술협회 강대운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A항목 B항목 관계
김기창 대한민국예술원 A는 B의 회원이다
김기창 박래현 A는 B의 배우자이다
김기창 김은호 A는 B의 제자이다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김기창 김은호 사사연도 1930년
김기창 김기창-명량대첩 제작연도 1973년
김기창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가입연도 1981년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5년 강대운-진주성싸움강대운에 의해 그려졌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좌영길, "예술작품산책 : 대검 청사 '계절'", 『법률신문』, 2012년 3월 5일.
  2. "추양", 『마이셀럽스』online, (주)마이셀럽스.
  3. "공작", 『마이셀럽스』online, (주)마이셀럽스.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단행본
    • 김기창, 『침묵의 심연에서-나의 화필 60년』, 법조각, 1988.
    • 이일 외, 『운보 김기창』, 에이피 인터내셔날, 1989.
    • 김기창, 『나의 사랑과 예술』, 정우사, 1993.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 현대문화사, 2009.
    •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1, 2009.틀:작가 류인태


개요

김기창(金基昶)은 한국의 대표적인 동양화가이다.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현대 한국 미술계에서 큰 자취를 남긴 거장으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적 성격의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언급되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남긴 그림들 가운데 특히 한국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다룬 작품들의 경우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함께 그 가치에 대한 평가가 여러 방향으로 나뉘고 있다.

생애

1913년 2월 18일 서울 운니동에서 당시 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던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 입학 이전까지의 유년기를 잠시 충청남도 공주에서 보내기도 했다.

1921년 승동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8살 무렵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에 의해 청각을 상실하였고 이로 인한 언어 장애의 증세까지 있었다. 이 일로 인해 김기창은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다.

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후 아버지 김승환은 아들이 청각장애가 있지만 체격이 크기 때문에 목수 일을 배우게끔 하려 하였지만, 어머니인 한윤명은 그가 그림 그리는 것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당(以堂) 김은호의 화숙인 낙청현에서 그림을 배우게끔 주선하였다.

1931년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지 6개월만에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를 출품해 입선하였다.(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했다.)

1936년 낙청현에서 김기창은 김은호를 사사한 장우성, 이유태, 백윤문, 이석호, 한유동, 장운봉 등과 함께 1월에 미술단체인 [후소회]를 창립하고, 10월 제1회 전시회 '조선남화연맹전'을 개최한다.

1940년 27살 무렵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꾸준히 입선한 경력을 바탕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는데, 이후로 광복 전까지 일본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그림을 그리는 등 친일적 성격의 작품 활동이 이어졌다.

1942년 당시 친일 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 1944년까지 지속되었다.

1943년 1월 애국백인일수전람회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협력하였다. 아내 우향 [박래현]과 처음 만난다.

1946년 박래현과 3년간의 필담연애 끝에 서울 남산에서 고백해 결혼하였다.

1947년 '운보-우향 부부전'을 시작으로 부부작가로 함께 미술 전시활동을 시작했다. 자유신문 미술기자,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등을 지냈다.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타이베이(台北)와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홍익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지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훗날 세종대학교)으로 교직을 옮긴다.(1974년까지 교수를 지냈다)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백양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1963년 5월 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하였다.

1969년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75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70년 미술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화단과 교육계에서 커다란 활동을 했다.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다.

1984년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 충북 청원에 '운보의 집'을 완공했다.

1989년 예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1993년 예술의 전당에서 '운보 김기창 팔순 기념 대회고전'을 개최하였다.

1994년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을 발간하였다.

2000년 7월 개인전 '미수 기념 특별전'을 열었다.

2001년 1월 23일 사망했다.

대표적 작품과 경향성

자유롭고 활달한 필력으로 힘차고 동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풍속화에서부터 극단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구상과 추상의 전 영역을 망라하는 폭넓은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 세종대왕_표준영정
  • 군마도
  • 청산도
  • 소와 여인
  • 가을
  • 보리타작
  •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 완전군장의 총후병사

전시와 수상경력 그리고 서훈

전시

생전 전시

사후 전시

수상경력

  • 1971년 제12회 3.1 문화상
  • 1972년 3.1문화상 심사위원 위촉
  • 1977년 3.1문화상 심사위원 위촉
  • 1981년 한독미술가협회 회장
  • 1982년 중앙일보 중앙문화예술상 본상
  • 1983년 예술원상
  • 1985년 후소회 회장
  • 1986년 '5.16민족상과 서울시 문화상'
  •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동남아채묵전 추진위원장
  • 1987년 '색동회상'
  • 1988년 서울 올림픽 아트포스터 제작 작가

서훈

  • 1977년 은관문화훈장
  •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
  • 2001년 금관문화훈장(추서)

논란과 평가

친일행적에 대한 시선

김기창의 스승 이당 김은호는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평의원으로 있었다. 스승의 영향으로 인해 김기창은 그림을 통해 일제의 전쟁동원에 간접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선남화연맹전(1940.10), 애국백인일수전람회(1943.1)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적극 협력 하였다.
친일 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이와 같은 김기창의 친일행적은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총후병사(1944.4)
  •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8.6)

(미정리)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그림과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있다”고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친일파 99인》에서 밝혔다. 그러나 〈총후병사〉에 대해서 김기창은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삽화에 불과해 친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고 친일작품행위를 부정했다. 이러한 운보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당시 남양군도에서 대검을 소총에 끼운 채 적진을 향하고 있는 일본군의 육박전을 묘사한 〈적진육박〉(1944)이라는 작품이 공개되면서 이 말은 거짓말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1944년 식민지 조선에서 대규모의 미술전시회가 열렸던 적이 있었다. 그 전시회 이름이 '결전(決戰) 미술전람회'였다. 여기에 김기창이 출품한 작품이 바로 저 작품으로 이름이 '적진육박'이다. 이 작품으로 그 당시 전람회에서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았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적진육박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됐다”고 밝혔다.

사후인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6점의 표준영정에 대한 재해석

김기창은 세종대왕, 을지문덕, 태종무열왕, 조헌, 김정호, 문무대왕 등 여러 역사인물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작품들은 모두 국가에 의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최근 친일파 인물로 평가받음에 따라 그가 그린 표준영정을 모두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으며,
세종대왕 표준영정의 경우, 이를 기반으로 만원권 지폐 등 세종대왕을 묘사한 각종 도안과 동상 등이 제작되었는데, 김기창이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해서 대중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멀티미디어 자료

*운보 김기창 판화전(2014.03.11~04.08)

관련정보

한글고문헌_전시자료

인물

  • 김기창은 김은호를 스승으로 두었다.
  • 김기창은 박래현을 아내로 두었다.

단체

공간

각주

참고문헌

온라인 문헌

● 전문기관 저작물

● 보도방송 저작물

● 공공이용 저작물

● 개인공간 저작물

오프라인 문헌

● 단행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