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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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장동룡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1일 (월) 16:22 판 (임진왜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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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權慄)
"권율",『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권율
한자표기 權慄
생몰년 1537년(중종 32)-1599년(선조 32)
본관 안동(安東)
시호 충장(忠莊)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언신(彦愼)
시대 조선
대표직함 의주목사, 도원수
권철(權轍)
성격 문신
유형 무장



정의

임진왜란 당시 이치싸움, 독산성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큰 공을 세운 조선 중기의 문신.

설명

이치싸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에 의해 한양이 함락된 뒤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한양을 향해 북진중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후방으로 후퇴하여 남원에 주둔하며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부대를 대파하고 전라 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행주대첩

12월 한양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수원 독산성(禿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독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행주산성에서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Quote-left.png 계사년 2월 권율이 수원(水原)에서 고양(高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군사를 나누어 4천여 명을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衿川)에 머물며 성원하게 하고, 권율 자신은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천강(楊川江)을 건너서 행주(幸州)에 진을 쳤다.

...... 적장 평수가(平秀家)는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발끝으로 차서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2일 새벽에 우리 척후 장교가, 적이 좌ㆍ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 붉은 기와 흰 기를 들고 온다고 보고하니 권율이 모든 군사에게 현혹(眩惑)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진영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적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이에 곧 모든 장수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고립된 군사가 깊이 들어와서 갑자기 적병을 만나니 세력이 서로 대적할 수 없다.만약 한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다.” 하고, 모든 장수에게 타일러서 대오(大悟)를 엄중히 단속하여 활을 버티고 기다리는데, 적의 선봉(先鋒)인 기병(騎兵) 백여 명이 먼저 와서 시위(示威)를 하더니 금방 대군 수만 명이 들을 덮고 우리 진영을 포위하였다. 이에 군사를 세 패로 나누어 쉬어가면서 교대로 달려드니 고함 소리는 땅을 흔들고 포탄이 비오듯 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으며, 권율은 몸소 물과 미음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군사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묘시(卯時)에서부터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에 적병은 세 번 달려들었다가 세 번 퇴각하였는데 번번이 적이 불리하니 적이 드디어 갈대를 가지고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불을 놓아 우리 성책(城柵)을 태우려 하므로 성안에서는 물을 끼얹어 꺼버렸다. 처음 승병(僧兵)에게 서북면(西北面)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의 군사가 크게 고함지르며 돌격하여 오자 승병이 무너져 내성(內城)으로 들어오므로 권율이 칼을 빼들고 독전(督戰)하니 모든 장수가 칼날을 무릅쓰고 육박전을 하였다. 이에 적군이 크게 패하여, 드디어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고 불태우니 냄새가 10리에 퍼졌다.적병이 물러가자 우리 군사가 그 나머지를 수습(收拾)하여 1백 30여 명을 베고 군용 자재를 무수하게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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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권율의 행주 승첩", 『연려실기술』online한국고전번역원.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권율 행주대첩 A은 B에 참가하였다
권율 이치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권율 독산성전투 A은 B에 참가하였다
조경 행주대첩 A은 B에 참가하였다
처영 행주대첩 A은 B에 참가하였다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권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권율",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권율과 행주대첩",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