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 회갑연
혜경궁 홍씨 회갑연(惠慶富 洪氏 回甲宴) | |
대표명칭 | 혜경궁 홍씨 회갑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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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惠慶富 洪氏 回甲宴 |
시대 | 조선 |
날짜 | 1795년 |
관련인물 |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장조), 조선 정조 |
관련유물유적 | 정조가 큰외숙모 여흥민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원행을묘정리의궤, 화성행궁 |
목차
정의
1795년 조선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화성행궁에서 연 잔치이다.
내용
조선 정조와 화성행궁의 건설
조선 정조는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해 정조 자신이 살아있을 때 왕위를 세자(뒤의 순조(純祖))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華城)에 은퇴해 만년을 살고자 하였다. 정조가 1794년(정조 18) 화성건설에 착수한 것은 10년 뒤에 이 곳에서 은퇴한다는 것을 고려하고, 동시에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60년 회갑을 맞이하는 1795년의 축하행사를 이 곳에서 치룬다는 것도 생각해 둔 것이었다. [1]
조선 정조와 화성행궁 원행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정조는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했다. 국왕이 능원에 참배하기 위해 궁 밖을 나가는 일은 모든 왕들의 관례로서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도 궁 밖 나들이가 많은 임금이었다. 국왕의 능행(陵幸)이나 원행(園幸)은 1년에 1회 혹은 2회가 보통이지만, 정조는 재위 24년간 66회의 행행을 하여 년 평균 약 3회를 기록했고, 그 중 아버지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했다. 정조가 이토록 행행을 많이 가진 이유는 가슴 아픈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2]
혜경궁 홍씨 회갑연
1795년(정조 19) 정조는 화성(華城)에서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벌이고 아버지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 윤 2월 9일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1800여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화성에 갔다가 16일 밤 서울로 돌아왔다. 8일간의 화성행차에서는 진찬(進饌) ․ 양로연(養老宴) ․ 문무과시취(文武科試取)22)와 방방(放榜)23) 등의 행사를 치뤘고, 진미(賑民)24) 4,813명과 사민(四民)25) 539명에 대한 쌀과 소금의 배급 등이 있었다. [3]
혜경궁 홍씨 회갑연의 특징
정조 19년에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행한 여러 행사 중에 중심이 되었던 것은 봉수당에서 행한 진찬(進饌)과 낙남헌에서 베푼 양로연(養老宴)이다. 이는 조선조에 자궁(慈宮)이 회갑을 맞는 경사가 처음 있는 일로, 이후의 전례가 된 행사이다. [4]
진찬과 양로연은 외연과 내연 구별 없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고, 양로연에서는 정재가 생략되었다. 또 두 연회 모두 주악을 담당한 악대의 편성이 전례와 달리 전정고취라는 독특한 편성을 하고 있다. 이는 궐 밖의 행사라는 특수성과 왕비의 신분이 아니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차등을 두었던 조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전체적인 연회 절차 는 궐내의 경우와 큰 차이가 없다. [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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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 [[혜경궁(혜빈)] | A는 어머니 B가 있다 | |
조선 정조 | 혜경궁 홍씨 회갑연 | A는 B를 주도하였다 | 1795년 |
혜경궁 홍씨 회갑연 | 화성행궁 | A는 B에서 일어났다 | |
혜경궁 홍씨 회갑연 | 봉수당 진찬 | A는 B를 포함한다 | |
혜경궁 홍씨 회갑연 | 낙남헌 양로연 | A는 B를 포함한다 | |
봉수당 진찬 | 화성행궁 봉수당 | A는 B에서 일어났다 | |
낙남헌 양로연 | 화성행궁 낙남헌 | A는 B에서 일어났다 | |
혜경궁(혜빈) | 혜경궁 홍씨 회갑연 | A는 B에 참여하였다 |
주석
- ↑ 강민영, 「봉수당 진찬과 낙남헌 양로연의 음악적 고찰: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9쪽.
- ↑ 강민영, 「봉수당 진찬과 낙남헌 양로연의 음악적 고찰: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9쪽.
- ↑ 강민영, 「봉수당 진찬과 낙남헌 양로연의 음악적 고찰: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10쪽.
- ↑ 강민영, 「봉수당 진찬과 낙남헌 양로연의 음악적 고찰: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11-12쪽.
- ↑ 강민영, 「봉수당 진찬과 낙남헌 양로연의 음악적 고찰: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