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陜川 海印寺 弘濟庵 四溟大師塔碑) |
|
대표명칭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
영문명칭 | Stele for Buddhist Monk Samyeong at Hongjeam Hermitage of Haeinsa Temple, Hapcheon |
한자 | 陜川 海印寺 弘濟庵 四溟大師塔碑 |
주소 |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54, 홍제암 (치인리)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301호 |
문화재 지정일 | 2000년 9월 28일 |
찬자 | 허균(許筠) |
서자 | 양만세(楊萬世) |
각자 | 미상 |
승려 | 유정(惟政) |
건립연대 | 1612년 |
승탑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
|
정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조선시대 승려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1544-1610)의 탑비.
내용
개요
전체높이 3.15m. 이 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것으로, 귀부(龜趺)·비신(碑身)[1]·이수(螭首)가 갖추어져 있다. 2면 비이며, 앞면 윗부분에 전서체(篆書體)로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慈通弘濟尊者四溟松雲大師石藏碑)’라 새겨져 있고, 끝에 '만력 40년 12월립(萬曆四十年十二月立)’이라 기록된 점으로 보아 1612년(광해군 4) 12월에 건립된 사명대사의 승탑에 부속된 탑비임을 알 수 있다.[2]
일제시대 때,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3] 허균(許筠)이 비문을 지었고, 양만세(楊萬世)가 비문을 썼다.[4]
2000년 보물 제1301호 사명대사의 승탑과 함께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陜川 海印寺 弘濟庵 四溟大師塔 및 石藏碑)'로 지정되었다.[5]
비문
비문에는 유정(惟政)의 일대기가 기록되어있다. 유정은 일찍이 배움에 뜻을 두고 힘써 공부하였으며, 13살 때 직지사(直指寺)에서 신묵(信黙)의 제자로 출가하였다. 17살때 승과(僧科)에 합격하였고, 이후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 도를 닦았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을 조직해 평양성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적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네 차례에 걸쳐 회담을 하기도 하였다. 임종 전에는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결가부좌(結跏趺坐) 한 채 입적하였다.
비문 보러가기 |
• "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 금석문세부정보, |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유정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허균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양만세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합천 해인사 | A는 B에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 ↑ "해인사 사명대사 승탑 및 석장비",
『두산백과』online .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행복한놀부,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석장비",
『네이버 블로그 - 절(터)를 찾아 떠나는 여행』online , 작성일: 2013년 8월 3일.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 "해인사 사명대사 승탑 및 석장비",
『두산백과』online .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행복한놀부,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석장비",
『네이버 블로그 - 절(터)를 찾아 떠나는 여행』online , 작성일: 2013년 8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