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오물투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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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오물투척사건(國會 汚物投擲事件) | |
대표명칭 | 국회 오물투척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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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國會 汚物投擲事件 |
시대 | 현대 |
날짜 | 1966년 9월 |
관련인물 | 김두한,이병철,박정희 |
관련단체 | 한국비료공업 |
정의
1966년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을 밀수하여 부당이득을 취하였다가 발각된 사건.
내용
발단
사카린 밀수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여당 국회의원의 언론제보였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건축자재로 위장한 밀수품을 팔아 거액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제보는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를 '5대 사회악'의 하나로 규정해놓고 있었으며, 당시 삼성과 경쟁 관계에 있던 언론들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일개 회사의 일탈이 아니라 정권과의 뒷거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전개
1966년 9월 22일 이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가 진행 중이던 국회 본회의에서 김두한 의원이 각료들에게 오물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한국비료공업 이병철 회장은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및 각종 언론,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결말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병철 회장은 70년대 후반 경영에 복귀했고 중앙일보를 창간 했으며 1983년에는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이병철의 아들 이맹희는 자신이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혔으며, 1993년 회고록을 발간하여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주장하였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이맹희 씨)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 ||
출처: 위키백과 기여자, "사카린 밀수 사건", |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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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 한국비료공업 | A는 B를 창립하였다 | 1964년 |
이병철 | 사카린 밀수사건 | A는 B를 주도하였다 | 1966년 |
사카린 밀수사건 | 국회 오물투척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966년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위키백과 기여자, "사카린 밀수 사건",
『위키백과』online , 최종확인:2017년 8월 8일. - "이병철 100년, 다시 돌아본 '사카린 밀수사건'", 『민중의 소리』, 2010년 2월 13일.
- "사카린밀수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회오물투척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위키백과 기여자, "사카린 밀수 사건",
- 단행본
- 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청산,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