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보부인
봉보부인 (奉保夫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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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봉보부인 |
---|---|
한자표기 | 奉保夫人 |
유형 | 제도 |
목차
정의
조선시대 외명부인 왕의 유모(乳母)에게 내린 종1품 작호(爵號). [1]
내용
유래
봉보부인은 중국 한(漢)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송나라에서는 진종(眞宗)의 유모 유씨(劉氏)를 진국연수보성부인(秦國延壽保聖夫人)이라 봉하였다. 조선 초기 세종도 이러한 중국 제도를 참작해 아보(阿保)의 공을 중히 여기고 법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유모 이씨를 아름다운 이름을 써서 봉보부인이라 칭하고, 품계를 종2품으로 정하였다.[2]
조선시대 관련 기록
왕의 유모에 대한 기록을 보면, 1421년(세종 3) 함길도에 근친 가인 행사직(行司直) 홍인부(洪仁富) 처의 유모 이씨에게 쌀과 콩을 각각 20석을 하사한 일이 있다. 그 이전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고려시대 문종이 형 덕종과 자신을 키워준 선비태후(先妣太后)의 친제(親弟)에게 노고를 갚기 위해 봉숭작읍(奉崇爵邑)하였던 사실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세종은 15년 호조에 명해 유모 이씨에게 쌀 40석, 콩 20석을 하사하고, 해마다 상례로 삼게 했으며 17년에는 유모를 봉보부인에 봉하였다. 31년 봉보부인 이씨가 죽자 상장에 필요한 물건과 관곽, 그리고 산역(山役)을 맡을 군인을 보내는 등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3]
단종도 봉보부인을 중히 여겨 세종 때의 예대로 해마다 쌀·콩 60석을 지급하고, 그 밖에도 토지와 노비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예종은 봉보부인의 녹봉을 이전의 예대로 지급하고, 의전(衣纏)·선반(宣飯)은 정1품 빈(嬪)과 종1품 귀인(貴人)과 같은 예로 대우하였다. 또한 예종은 유모 홍씨의 족친 중 삼촌까지 양민(良民)이 되게 하였다. 성종은 봉보부인의 죽음에 사흘간 조회를 열지 않는 예우까지 하였고, 단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일에도 봉보부인은 종친부인들과 빈잉(嬪媵)·공주와 함께 참석하였다.[4]
지위와 대우
그 대우는 물질뿐만 아니라 신분까지도 높여주었으며, 모든 행사에도 예우로써 대하였다. 봉보부인은 세종 대에서 성종 대에 이르러 제도가 완비, 『경국대전』 외명부조에는 종1품으로 제정되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봉보부인 | 왕실 의복 반사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경국대전 | 봉보부인 | A는 B를 언급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봉보부인(奉保夫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봉보부인(奉保夫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봉보부인(奉保夫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봉보부인(奉保夫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봉보부인(奉保夫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저서
- 이흥구, 손경순,『한국궁중무용총서 . 3 , 무애무(無㝵舞)·아박무(牙拍舞)·무고(舞鼓)』, 보고사, 2009.
- 송준영, 김미숙, 『정재무도홀기』, 조선대학교출판부, 1998
- 단행본(마이크로필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봉보부인등록」,한국학중앙연구원, 2004.
- 논문
- 한희숙, 「조선 전기 봉보부인(奉保夫人)의 역할과 지위」, 『조선시대사학보』, 조선시대사학회, 51-93(43쪽), 2007.
- YouTube 동영상
- EBSCulture (EBS 교양), "EBS 역사채널e, 귀하신 몸(조선 왕의 유모)" (방송일: 2012.11.23), YouTube, 작성일: 2013년 10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