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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신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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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26일 (수) 14:32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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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신광사
(海州 神光寺)
대표명칭 해주 신광사
한자 海州 神光寺
건립시기 신라 문무왕(661~681) 때
경내문화재 신광사오층탑, 신광사무자비



정의

황해남도 해주시 신광리에 있었던 절.

내용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에 따르면, 923년(태조 6) 입조사(入朝使) 윤질(尹質)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한 것으로 보아 창건연대 또한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1]

Quote-left.png 당(唐)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辛未)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원홍(元弘)이 부처님 어금니 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923), (곧) 본조 태조(太祖) 즉위 6년 양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윤질(尹質)이 가져 온 5백나한상(五百羅漢像: 석가의 제자로서 공양을 받을 자격을 지닌 5백 명의 고명한 제자)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 있다. Quote-right.png
출처: "진당대 원홍이 가져온 불아와 윤질이 가져온 5백나한상은 신광사에 있다",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고려 말기 원(元)나라 순제(順帝)가 제위에 오르기 이전에 황해의 대청도(大靑島)에 귀양 오게 되어 이곳을 지날 때에 풀 속에 한 부처가 있음을 보고, 그 부처에게 속히 귀국하여 왕이 되게 해주기를 빌었던 바, 그 후 귀국하여 왕이 되자 많은 재물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2]

1720년(숙종 46) 건립된 「신광사사적비(神光寺事跡碑)」에 의하면 1333년(충숙왕 2)부터 1341년(충혜왕 복위 2)까지 중창 공사가 있었다고 하며 당시의 전각들은 웅장하고 화려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신광사의 승려가 1,000여명에 이른다고 하고 있어 대찰이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신광사사적비」에는 1677년(숙종 3) 절에 화재가 일어나 전각 요사채 천여가구가 전소하였다고 하였으며 다음 해인 1678년(숙종 4) 보광전(普光殿)을 중건하고 설법전(說法殿)·약사전(藥師殿)·시왕전(十王殿)·만세루(萬歲樓)·요사 등을 세웠다고 하였다.[3]

현재는 폐사되었으며, 문화재로는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인 신광사오층탑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인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가 있다.[4]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주석

  1. 정병조, "신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주, 『북한의 전통사찰』, 양사재, 2011. 온라인 참조: "신광사터", 북한의 전통사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1998_북한문화재해설집2(사찰건축편)_북한.pdf", 원문정보,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4. 정병조, "신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