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표준영정
정의
현초 이유태(玄艸 李惟台)(1916~1999) 화백이 그린 퇴계 이황의 표준영정으로 천 원 권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내용
현초 이유태(玄艸 李惟台)(1916~1999) 화백이 그린 퇴계 이황의 표준영정으로 천 원 권 지폐에 사용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원제는 「퇴계 이황선생 영정(退溪 李滉先生 影幀)」이며 당시 이유태의 화풍이 잘 들나 있다. 이 초상화는 먼저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후 제작에 착수하는 일반적인 사례와는 달리 조폐용으로 인쇄하기 위해 그러진 것이 후에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한국은행에서 소장하고 있다.[1]
화폐권 발행과 표준 영정
- 율곡 초상화 논란
화폐에서 표준영정의 필요성이 높아진 것은 1972년 율곡의 초상화를 둘러싼 논란 때문이었다. 1972년에 5,000원권이 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율곡의 콧날이 날카롭고 매섭게 표현되어 마치 서양사람 같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것은 5,000원권의 원판을 영국의 토마스 데라루 사에 제작 의뢰한 결과 빚어진 일이었다.
- 화폐권 발행을 위한 표준 영정의 제작
이외에도 역사적인 인물의 동상이나 영정을 제작할 때마다 인물들의 모습이 조금씩 차이가 나 사회적인 물의를 빚는 일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1973년 6월 선현의 동상 건립 및 영정 제작에 관한 심의절차를 제정하여 동상이나 영정 제작 등에는 반드시 정부가 최종 승인한 표준영정만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한국은행은 1973년 9월에 발행한 500원권의 충무공 초상부터 표준영정을 사용했다. 또한 이미 시중에 유통되고 있던 10,000원권과 5,000원권의 초상도 표준영정으로 바꾸어 실어야 했다. 이에 따라 1977년 적당한 높이의 코와 온화한 표정의 율곡 초상이 실린 5,000원권이 새롭게 발행되었다.[2]
영정 속 퇴계의 모습과 논란
이 초상에서 퇴계는 폭건(幅巾)과 심의(深衣) 등 사대부의 전형적인 편복을 입고 있는데 이는 공등무성(工藤武城) 소장의 정자관(程子冠)을 비롯한 이전의 초상들과는 모습이 다르다. [3]
초상화가 낡아지거나 어떤 변화에 의해서든 당연한 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시대에 맞는 의복으로 다시 해석되는 것은 결국 초상화가 제작될 당시의 사회, 정치적 명분에 따라 인물이 재해석되었고 그것이 초상화에 반영된 것임을 보여준다.[4]
- ↑ 최재목, 「퇴계상(退溪像)의 변모 -초상화(肖像畵)를 통해서 본 선비상(像)의 변천에 대한 시론(試論)」, 『퇴계학보』 vol. 130, 퇴계학연구원, 2011, 228-9쪽
- ↑ 『한국의 박물관 : 화폐』. 네이버 참조: '표준영정 은행권',
『한국의 박물관 : 화폐』online , 한국박물관연구회. - ↑ 최재목, 「퇴계상(退溪像)의 변모 -초상화(肖像畵)를 통해서 본 선비상(像)의 변천에 대한 시론(試論)」, 『퇴계학보』 vol. 130, 퇴계학연구원, 2011, 229-30쪽
- ↑ 조은정, 「표준영정에 대한 연구-공동체 의식과 감정통합의 균일화 과정-」, 『로컬리티 인문학』, 2016, 257쪽
- ↑ 최재목, 「퇴계상(退溪像)의 변모 -초상화(肖像畵)를 통해서 본 선비상(像)의 변천에 대한 시론(試論)」, 『퇴계학보』 vol. 130, 퇴계학연구원, 2011, 229-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