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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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청(開淸) | |
대표명칭 | 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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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Gaecheong |
한자 | 開淸 |
생몰년 | 835(흥덕왕 10)-930(경순왕 4) |
시호 | 낭원(朗圓) |
휘 | 개청(開淸) |
성씨 | 김씨(金氏) |
출신지 |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 |
승탑 |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 |
승탑비 |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은 835년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그의 선조는 신라의 명문(名門)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김유차(金有車)는 한때 강군(康郡,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일찍부터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고자 하는 생각에 가득 차 있어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시골에 은거(隱居)하였다.[1]
개청에 탄생과 관련해서는 한 신승(神僧)이 개청의 어머니에게 금인(金印)을 주었다는 태몽이 전해진다.
어머니는 복보씨(復寶氏)로 어느 날 밤 혼교(魂交: 잠을 자던 중)에 홀연히 아름다운 상서를 얻었으니 갑자기 신승(神僧)이 허공으로부터 내려와서 뜰 아래에 서서 품안에서 금(金)과 나무로 만든 도장 2개를 꺼내 보이면서 하는 말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필요한가"하였다. 어머니는 맥맥(脈脈: 끊임없이 계속)히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으니, 스님이 곧 금인(金印)만 남겨두고 갔다. 어머니는 꿈을 깬 후 비로소 임신한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오신채(五辛菜)[2]와 어육(魚肉)은 모두 끊고, 엄숙하게 인사(仁祠: 사원(寺院))를 시설하고 불사(佛事)를 닦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와 같이 태교와 공덕을 닦다가 만삭이 되어 대중(大中) 8년[3] 4월 15일에 탄생하니, 대사의 얼굴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이 단정하고 입술은 홍련(紅蓮)과 같았다. | ||
출처: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142쪽. |
출가수행
개청은 8세 때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儒學)을 익히다가, 25세 때에 출가하여 화엄사(華嚴寺)의 정행(正行)에게 가서 수행하였다.[4] 강주(康州, 지금의 함양 지역)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5]
(귀국 및) 활동
입적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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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41쪽.
- ↑ 냄새가 강하고 독특한 다섯 가지 채소. 마늘·파·부추·달래·생강. 경론(經論)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 일정하지 않음.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오신채",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본 비문 중 대사(大師)의 탄생이 대중(大中) 8년(854년)이고, 입적이 동광(同光) 8년(930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입적시 대사의 나이가 96세, 승랍이 72세라 하였으니 이는 2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대중 8년은 오기(誤記)로 보아야 할 것이다.
- ↑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강릉 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32-157쪽.
- 김위석, "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