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 |
한자명칭 | 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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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A writing recommending people to do good. It was written as Shinmi, Hakyeol and Hakjo were refurbishing Sangwonsa in 1464 (Sejo 10). |
작자 | 신미信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
작성시기 | 1464년 |
소장처 | 월정사 성보박물관 |
문화재지정사항 | 국보 제292호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32.5×12.0㎝ |
판본 | 필사 |
수량 | 2첩 |
표기문자 | 한자, 한글 |
목차
정의
혜각존자 신미(信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이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권선문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혜각존자 신미(信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이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권선문이다. 권선문은 사원의 중수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주 권장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다. 세조는 신미 등의 권선문에 화답해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시주하면서 어첩(御牒)을 지어 함께 보냈다. 신미 등이 지은 권선문과 세조의 어첩이 2책으로 첩장되어 월정사에 보관되어 있다.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구성되었는데,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신미, 학열, 학조 등의 수결(서명)이 있으며, 세조가 보낸 어첩에는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표장(表裝)은 붉은색의 당초문이 들어간 비단으로 제책되어 있다. 세조의 어첩이 수록된 책의 표지에는 ‘어첩(御牒)’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이 문서는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며, 당시의 국어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전하는 한글 문헌은 판각본과 활자본이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이 자료는 수기(手記)로 작성된 오래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1]
『상원사 중창 권선문』의 구성
『상원사 중창 권선문』은 두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책 한 권에는 두 건의 편지글의 한글 원문과 언해를 필사한 책이고 나머지 한 권은 앞의 편지글의 한문만 필사가 되어 있다. 편지글은 1464년(세조 10년) 상원사를 증수할 때 국왕으로부터 어의와 미포, 중창에 필요한 물품과 함께 받은 어첩과 국왕으로부터 위의 물품과 어찰을 받은 것에 사례(謝禮)하는 글(이하 권선문)을 올린 것으로서 두 편지글 모두 상원사 중창의 취지를 담은 권선문이다. 이 두 권 중 언해와 한문 원문이 담겨진 책에만 붉은 비단에 어첩(御牒)이라고 적힌 첩장 형식의 표지가 있다.(이하 ‘어첩’) 두 편지글 모두 친필이 아닌 필사본인데다 ‘어첩’에만 비단 표장을 한 것으로 보아 상원사에서 여성 신도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제작한 판본으로 추정된다.[2]
『상원사 중창 권선문』의 저술 목적
『상원사 중창 권선문』의 공개 대상을 여성 신도로 한정하여 가설한 이유는 ‘어첩’에 세조의 수결과 옥새, 자성왕비(慈聖王妃)의 인기, 세자의 수결과 인기, 세자빈의 인기, 공주 부부인 등 왕실, 종실 여인들을 위주로 한 10여명의 인기가 실려 상원사 중창에 지원했음을 밝힌 반면 언해본이 없는 문건에는 세조와 왕비 공주 등의 인기는 제외되고 관리들과 관찰사, 목사 등 230여명의 인기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왕실, 종실 여성의 불교 후원에 대해 알리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으며 언해를 첨부한 것으로 보아 권선문을 보여주려는 신도들은 주로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상원사 중창 권선문』의 저술의 시기
『상원사 중창 권선문』는 권선문에만 말미에 ‘천순(天順) 8년(세조 10년, 1464)인 갑신년(甲申年) 12월 18일’로 편지를 쓴 날짜가 표기되어 있고 세조의 어첩에는 날짜에 관한 언급이 없어 저술 시기와 순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책의 구조상 사례문이 어첩보다 먼저 기술되어 있으므로 권선문을 쓴 시기가 어첩보다 일렀음은 알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답례의 글은 물건을 받은 이후에 쓰는 것이지만 권선문과 세조의 어첩에 각각 “ 양전(兩殿)이 들으시고 특별히 윤명(綸命)을 내리셔서 …… 어의 (御衣) 몇 벌을 내시며, ‘쌀과 포화(布貨)와 토목 공사(土木工事)에 쓸 것을 주어라’(라고) 하시니 (兩殿聞之特降綸命 ……出御衣若干襲命輸米布土木之費)“, ”또 대사(大師)가 학열(學悅)스님, 학조(學祖)스님과 함께 나를 위하여 옷을 다 팔아서 영(靈)한 절을 다시 지으려 함을 들었다. (又聞師與悅師祖師爲我盡賣衣資重創靈刹)“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를 보면 신미 등이 국왕의 강녕을 빌고자 상원사를 중창하면서 형편이 어려워진 것을 알게 된 세조가 필요한 물자를 보내라는 명을 내렸고, 이 소식을 들은 신미 등이 감사를 표하는 글을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세조의 명을 듣고 권선문을 올린 후 물자와 함께 어첩이 도착했을 것인데 물품들은 옷과 양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사에 필요한 목재들이어서 수급하는 데 상당 기간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첩을 쓴 시기는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세조실록』에 상원사에 보낸 물자와 같은 품목을 보내라고 쓴 날짜가 1465년 2월 20일인 점, 그리고 『상원사 중창사적기』에서 1465년 3월에 중창을 시작했다고 기록된 점을 볼 때 1465년 2월 20일~3월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4]
세조와 상원사
세조는 즉위 이전부터 불경을 언해하거나 불교 관련 행사를 지원하는 등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신미는 왕사(王師)로서 세조의 불교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왕실 불사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었다. 그는 수미(守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동생 김수온과 더불어 간경 사업의 핵심 세력이 되었고, 원각사 창건에도 일정 부분 참여하였다. [5] 세조의 병환이 심해지자 신미는 정희왕후에게 상원사를 중창할 것을 건의했다. 세조의 병이 점차 나아지자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신미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464년 |
학조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464년 |
학열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464년 |
상원사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세조 | 어첩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465년 |
어첩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 A는 B에 포함된다 | |
신미 | 세조 | A는 B의 스승이다 | |
신미 | 원각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정희왕후 | 신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정희왕후 | 상원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세조 | 정희왕후 | A는 B의 남편이다 |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 월정사 성보박물관 | A는 B에 보관되었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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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4년 | 신미, 학조, 학열이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세조에게 보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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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86794 | 128.564142 | 평창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지었다 |
37.731466 | 128.592464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이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