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사
| 청도 운문사 (淸道 雲門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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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명칭 | 청도 운문사 |
|---|---|
| 한자 | 淸道 雲門寺 |
|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
| 교구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
| 건립시기 | 557년 |
| 경내문화재 |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 청도 운문사 동호,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청도 운문사 석조사천왕상,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청도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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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1]
내용
역사
557년(진흥왕 18)에 한 신승(神僧)이 대작갑사(大鵲岬寺)[2] 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네 개의 작은 절(가슬갑사, 대비갑사, 천문갑사, 소보갑사)[3]을 창건하고 이를 오갑사(五岬寺)라 불렀는데 그 중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다.[4][5]
600년에는 원광국사가 절을 제 1차 중창하였고[6], 동쪽에 있는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귀산과 추항 등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였다.[7][8] 930년에는 보양국사가 제 2차 중창하고 절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이후 보양의 계책에 힘입어 산적을 토벌한 고려 태조는 이에 보답하기 위해 973년,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9] 1105년에는 원응대사 학일(學一)이 제 3차 중창하였고 이후 제 2의 선종사찰이 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10][11] 1193년에는 운문사 일대를 중심으로 김사미난 등 농민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277년에는 일연이 5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을 시작했다.[12]
임진왜란 때는 건물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는데, 1718년에 설송대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1954년 이후에는 비구니 중심의 도량으로 변모하면서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었다. 1977년에는 명성이 주지로 취임하여 대웅보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을 신축·중수하면서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였다.[13]
가람배치
운문사는 '연꽃의 화심'에 비유되기도 한다. 남쪽의 운문산, 북동쪽에 호거산, 서쪽의 억산과 장군봉, 그리고 여러 높고 낮은 봉우리가 돌아가며 절을 감싸안고 있기 때문이다. 운문사는 평평한 대지에 위치한 평지가람으로서 그 앉음새가 특이하다. 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보이고 있다. 산세를 따르다 보면 모든 건물을 북향으로 앉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호거산은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로 향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로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한다.[14][15]
특징
비구니 사찰 명성
운문사와 이무기 전승
운문사의 처진소나무
수령 500년에 이르는 이 소나무는 주변의 인공적인 압력이 없이도 늘어져서 넓게 자란다.[16] 가지가 밑으로 자라기 때문에 많은 받침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17] 나무와 관련해서는 500여 년 전 한 고승이 시든 가지를 꺾어다 심었다는 유래와 임진왜란 당시 사찰건물이 불탔을 때 칡덩굴이 감싸 안아 화를 면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운문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3일, 영양공급을 위해 12말의 막걸리를 뿌려주는 행사를 한다.[18]
옛문헌 속 운문사
보양이 작갑사를 창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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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祖師) 지식(知識)이 중국에서 법을 전해 받고 돌아오는데 서해 중간에 이르니 용이 맞이하여 용궁에 들여서 경전을 염송하게 하고 금라가사 1령을 베풀어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시봉하여 쫒아가게 하면서 부탁하여 말하였다. “지금 삼국이 혼란하여 아직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었다. 만약 내 아들과 함께 본국에 돌아가서 작갑에 절을 세우고 거하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수년이 지나지 않아 또한 물리칠 수 있고, 반드시 불법을 지키는 어진 군주가 나와 삼국을 평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홀연히 노승이 나타났는데 스스로를 원광이라 칭하였고, 인궤(印櫃) 품에 안고 있다가 꺼내주고 사라졌다.
이에 보양이 장차 폐사를 일으키려 북쪽 고개에 올라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 탑이 있었다. 내려와 그것을 찾으니 곧 흔적이 없었다. 다시 가서 바라보니 까치 무리가 땅을 쪼고 있으므로 이에 해룡이 한 작갑의 말을 기억하고는 그곳을 파보니 과연 남겨진 벽돌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고 그것을 모아 높게 쌓아 탑을 이루고 남긴 벽돌이 없었으니 이곳이 전시대의 가람터인 것을 알았다. 절을 창건하는 것을 마치고 주석하고 인하여 작갑사라 이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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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보양이목」, 『삼국유사』제 5의해[19] | ||
보양이 태조를 도와 산적을 토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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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법사가 당에 갔다 돌아와 먼저 추화군(推火郡)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 마침 태조가 동쪽을 정벌하여 청도(淸道)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산적이 견성(犬城)에 모여 있었는데 교만하여 격살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산 아래에 이르러 법사에게 쉽게 제압하는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답하여 말하였다. “무릇 개의 본성은 밤의 일은 맡고 낮의 일은 맡지 않아서 앞을 지키고 그 뒤를 잊고 있으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야 합니다.” 태조가 그를 따르니 과연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 신통한 지략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가까운 현(縣)의 조(租) 50석을 지급하여서 향화(香火)를 이바지하게 했다. 이로써 절에 이성(二聖)의 진용(眞容)을 안치하였고 인하여 봉성사(奉聖寺)라 이름하였다. 후에 작갑사로 옮겨가서 절을 크게 세우고 죽었다. | |
| 출처: 「보양이목」, 『삼국유사』제 5의해[20] | ||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동호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석조사천왕상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비로자나삼신불회도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청도 운문사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 원광 | 청도 운문사 | A는 B를 중창하였다 | 600년 |
| 보양 | 청도 운문사 | A는 B를 중창하였다 | 930년 |
| 학일 | 청도 운문사 | A는 B를 중창하였다 | 1105년 |
| 일연 | 청도 운문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277년 |
| 설송 | 청도 운문사 | A는 B를 중창하였다 | 1718년 |
| 고려 태조 | 청도 운문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 화랑도 | 청도 운문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 삼국유사 | 청도 운문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 청도 운문사 | 대구 동화사 | A는 B의 말사이다 | |
| 김사미난 | 청도 운문사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간정보
| 시간정보 | 내용 |
|---|---|
| 557년 | 한 신승이 운문사를 창건했다 |
| 600년 | 원광이 절을 중창하고 세속오계를 전수하였다 |
| 930년 | 보양이 절을 중창하고 이름을 작갑사라하였다 |
| 937년 |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려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 |
| 1105년 | 학일이 절을 중창하였다 |
| 1193년 | 운문사 일대에서 김사미난이 일어났다 |
| 1277년 | 일연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었고,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하였다 |
| 1718년 | 설송이 운문사를 중창하였다 |
| 1958년 |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었다 |
| 1977년 | 명성이 주지로 취임하여 절을 신축·중수하였다 |
| 1997년 |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K-HERITAGE, "가을에 만난 보물의 보고 청도 운문사", YouTube, 게시일: 2015년 1월 18일.
- HankyorehTV, "[하늘이 감춘 땅 비구니 사찰 청도 운문사]", YouTube, 게시일: 2012년 12월 2일.
주석
- ↑ 김위석, "운문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작갑(鵲岬)이란 이름은 까치가 찾아준 벽돌로 탑을 조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순천,「청도 운문사의 나한신앙 고찰」, 『정토학연구』, 26집, 한국정토학회, 2016, 175쪽.
- ↑ 대비갑사는 지금의 대비사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나머지 3갑사는 모두 폐사되어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청도 운문사의 나한신앙 고찰」, 『정토학연구』, 26집, 한국정토학회, 2016, 175쪽.
- ↑ "청도 운문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당시 대작갑사가 창건된 목적은 흉맥을 진압하기 위하였다고 한다,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17』- 경북의 전통사찰 Ⅳ, 사찰문화연구원, 2001, 429쪽.
- ↑ 채헌(彩軒)이 쓴 「호거산운문사사적」에는 원광이 운문사의 첫번째 중창자로 등장하지만, 일연은 이를 부정하면서 김척명(金陟明)이라는 사람이 거리에 떠도는 얘기를 잘못 듣고 보양의 사적과 뒤섞어 기록하는 바람에 원광이 운문사가 연관 있는 것처럼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흥선,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일연, 『삼국유사』「원광서학」. 온라인 참조: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원광의 활동",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 당시 운문산 일대에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졌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운문사 소개",
『호거산 운문사』online , 대한불교조계종. - ↑ 진관스님, "운문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청도 운문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원응국사비에서는 "운문사 산문(山門)의 융성함이 근고이래(近古已來)로 이 같은 적이 없었다."고 평했다.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
『한국 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진관스님, "운문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흥선,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흥선,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청도 운문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운문사 소개",
『호거산 운문사』online , 대한불교조계종. - ↑ "경북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
『진주성지킴이회』online . - ↑ 배상원, 민숙, 「운문사(雲門寺) 처진 소나무」, 『숲과 문화』, 제15권 2호, 2006.
- ↑ "보양이 작갑사를 창건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보양이 태조를 도와 산적을 토벌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 곽승훈, 「고려시대 운문사 창건연기와 변천과 역사적 의의」,『한국사학보』, 제 30권, 한국사학사학회, 2014.
- 김광식, 「운문사의 寺格과 明星의 불교 인문정신」,『정토학연구』, 26집, 한국정토학회, 2016.
- 박순천,「청도 운문사의 나한신앙 고찰」,『정토학연구』, 26집, 한국정토학회, 2016.
- 배상원, 민숙, 「운문사(雲門寺) 처진 소나무」, 『숲과 문화』, 제15권 2호, 숲과문화연구회, 2006.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17』- 경북의 전통사찰 Ⅳ, 사찰문화연구원, 2001.
- 안병우, 「운문사와 김사미란」, 『한국역사연구회회보』, 제2호, 한국역사연구회, 1989.
- 유홍준, 「청도 운문사(상): 저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0』, 월간 사회평론 길, Vol.93 No.9, 1993.
- 유홍준, 「청도 운문사: 새벽 예불과 운문사 사적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1』, 월간 사회평론 길, Vol.93 No.10, 1993.
- 유홍준, 「청도 운문사: 연꽃이 피거든 남매지로 오시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2』, 월간 사회평론 길, Vol.93 No.12, 1993.
- 천혜숙, 「운문사 주변 '이무기' 전승의 실제와 지역사적 맥락」, 『실천민속학연구』, 제29호, 실천민속학회, 2017.
- 김위석, "운문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진관스님, "운문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흥선, 『답사여행의 길잡이8 - 팔공산 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7. 온라인 참조: "운문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청도 운문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운문사 소개",
『호거산 운문사』online , 대한불교조계종. - "경북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
『진주성지킴이회』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