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섭-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
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 | |
작가 | 최대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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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연도 | 1978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사회 |
분류 | 유화 |
소장처 | 독립기념관 |
개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 민중대회를 열고 연설을 들으며 환호하는 모습을 그렸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1898년에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의 수호와 자유 민권의 신장을 위하여 조직・개최하였던 민중대회이다.[1]
설명
작품 소재
1차 만민공동회에서는(1898년 3월 10일)는 약 1만여명의 민중들이 종로 백목전 근처에 모여 외세의 배격과 의회 설립등을 주장하며, 러시아의 절영도(현재의 부산 영도) 저탄소 조차 반대·러시아 군사교관 재정고문의 철수 노한은행(露韓銀行)의 철거 등을 요구하였다. 만민공동회라는 명칭은 1898년 3월 12일 독립신문 잡보에 처음 등장하였다. 3월 12일에는 서울 남촌에 사는 수만명의 평민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출동한 시위대 군이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 두 날의 집회로 대한제국 정부는 절영도 조차를 거부하고, 러시아는 절영도의 해군기지를 이동하고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와 로한은행을 철폐하였다.[2]
2차 만민공동회(1898년 4월 25일~10월 12일)는 정부개혁을 두고 수수적인 대한제국 정부와 독립협회, 정부와 만민공동회 사이의 상소와 답변에 대한 논의와 협상을 그 배경으로 한다. 서울 민중들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덕수궁앞에서 고종 황제에게 근대적 법제도 실시와 간신배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장작불을 피우고 철야 시위를 하였다. 마침내 고종황제는 10월 12일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박정양을 수반으로 하는 개혁파 정부를 출범시켰다.[3]
1898년 11월5일 친러수구파의 '익명서 조작사건'으로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17명의 독립협회 가부를 체포하였다. 이에 조선 민중들은 철야 시위를 통해 지도자 석방과 의회설립운동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보부상과 황국협회의 습격을 받아 독립협회 회원인 김덕구가 사망하게 되었고, 마침내 고종 황제를 설득하여 11월 26일 국태민안 칙어를 받아 내었다. 고종 황제와 수구파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개혁조치를 취하지 않자 12월 6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헌의6조'의 실시 5흉의 재판과 처벌, 보부상의 혁파등을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다. 12월 22일 고종 황제는 만민공동회의 죄목 11가지를 열거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3차 만민공동회(1898년 11월 5일~12월 26일)를 물리력으로 해산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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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민족기록화
1894년 오승윤-동학교주 전봉준
1905년 11월 30일 손수광-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순국
1906년 5월 장리석-홍주성수복
1906년 정창섭-태백산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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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박영선-이등박문을 총살하는 안중근의사
1910년 장리석-민족을 계몽하고 있는 안창호선생
1915년 박각순-교정에 선 이승훈 선생
1919년 3월 1일 최대섭-민족대표의 독립선언
1919년 3월 1일 문학진-파고다공원의 3.1독립만세시위
1920년 손수광-청산리싸움
1920년 임직순-홍범도장군의 봉오동전투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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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섭 | 최대섭-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 | A은 B를 그렸다 | 1978년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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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최대섭이 최대섭-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를 제작하였다. |
1998년- | 독립기념관이 최대섭-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를 소장하고 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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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83745 | 127.223215 | 독립기념관이 최대섭-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를 소장하고 있다. |
37.570054 | 126.983717 | 만민공동회는 종로 보신각 인근에서 개최되었다 |
그래프
참고문헌
- "만민공동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