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묘(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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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묘(徐苗)

(? ~ 302)

서진의 인물. 자는 숙주(叔胄). 청주 고밀군(高密郡) 돈우현(淳于縣) 출신. 위나라 시기 상서랑을 지낸 서소(徐邵)의 손자.

어릴 적부터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공부를 좋아하여, 낮에는 쟁기를 들고 일하고, 밤에는 경전을 읊으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이후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동생 서가(徐賈)와 함께 제남군의 박사 송균(宋鈞)의 제자로 들어가 그의 수업을 들었다.

서묘는 항상 열정이 넘치고 재산을 경시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유학에 통달하고 여러 지식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또, 형제 간의 우애도 깊어, 동생이 농궤(膿潰)를 앓자 서묘가 직접 고름을 빨아주기도 했고, 형제가 요절하면 서묘는 홀로 남겨진 조카들을 거두어 보살펴 주기도 하였다. 서묘의 이런 선행은 비단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지인들에게도 미쳐, 이웃이나 그와 함께 수학하던 문하생 등도 그의 대가 없는 도움을 받았다. 서묘의 순수함과 의로움이 이와 같으니, 그의 스승인 송균도 그 행실을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군(郡)에서 효렴으로 살펴져, 주(州)에서 서묘를 종사, 별가, 치중으로 징소하고, 조정으로부터 5차례나 박사로 초청받았으나, 서묘는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서묘는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오경동이평》(五經同異評), 《현미론》(玄微論)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영녕 2년(30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명에 따라 장례는 매우 소박하게 치러졌다.


서묘 (徐苗, ? ~ 302년)

    • 서진(西晉) 시기의 학자·은둔자**
    • 자(字)**: 숙주(叔胄)
    • 출신**: 청주 고밀군 순우현 (현 중국 산둥성 안추시 근처)
    • 대표적 특성**: 효행, 학문, 명예를 멀리한 청빈한 삶
    • 생애와 주요 사적**

1. **초기 생애** 가문은 조위(曹魏) 상서랑 서소(徐邵)의 후예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가난하게 자람. 어려서부터 낮에는 농사일을 하며 밤에는 경전을 공부하는 등 근면히 학문에 매진. 동생 서가(徐賈)와 함께 제남군의 박사 송균(宋鈞)에게서 유학을 배움.

2. **인품과 행적**

    • 효우(孝友)**: 동생이 종기로 고통받자 직접 고름을 빨아주었고, 형제가 요절하자 조카들을 양육함.
    • 청빈과 베풂**: 재산을 나눠주며 이웃과 문인들을 도왔으나, 자신은 소박하게 생활.
    • 벼슬 거절**: 주(州)와 조정에서 5차례나 관직(박사 등)을 제안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은둔함.

3. **학문적 업적** 저서 《오경동이평》(五經同異評): 유교 오경(五經)의 해석과 비교 연구. 《현미론》(玄微論): 현학(玄學)과 유학의 사상을 융합한 논저. 당대 지식인들에게 도덕적 귀감으로 존경받음.

4. **말년과 영향** 302년(서진 혜제 영녕 2년) 사망. 유언에 따라 간소한 장례를 치름. 《진서》(晉書)에는 전기(傳記)가 없으나, 《고사전》(高士傳)과 지방지(地方志)에 행적이 기록됨.

    • 역사적 의의**
    • 위진남북조 시대 은일(隱逸) 사상의 구현**: 혼란한 시대에 벼슬을 거부하고 학문과 도덕으로 생을 마감한 전형적 사례.
    • 유가적 실천**: 효도와 우애를 몸소 실천하며 가문과 지역 사회의 모범이 됨.
    • 한계**: 공식 기록이 부족해 생애의 세부 사항은 추가 고증이 필요.
    • 관련 자료**

《산동통지》(山東通志) 등 지방지 《진서》 단편 기록 후대 《고사전》류의 은일자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