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막(동진)
서막(徐邈)
(344 ~ 397)
동진의 인물이며 자는 선민(仙民)으로 서주 동관군(東莞郡) 고막현(姑幕縣) 출신. 서광의 형. 서진 시기 서주에서 치중를 지내던 조부 서징지(徐澄之)는 영가의 난이 일어나자 남하하여 경구(京口)에 자리잡았으며, 부친 서조(徐藻)는 동진 조정에 출사해 태학박사를 지냈다고 한다.
자태와 성품이 단아하고, 공부를 할 때는 항상 부지런히 하여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다. 젊을 적에는 동향인 장수(臧壽)와 더불어 제(齊) 지역 출신 명사로 손꼽혔으나, 다른 명사들과 달리 서막은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독서에만 매달리며 성읍을 유람하러 다니지 않았다.
효무제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유학자들을 널리 모집하자, 서막은 태부 사안에 의해 천거되어 나이 44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중서사인에 임명되었다. 서막은 비록 입만 열면 경전을 줄줄 욀 정도로 통달하진 않았지만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 다른 학자들이 그가 해석한 5경을 그대로 따랐다. 이후 서막은 산기상시로 승진하여 10년 동안 효무제가 궁금한 것을 질문할 때마다 그 곁에서 답하였는데, 가능과 불가능에 대해 솔직히 답하고 이로운 것이 많게 하니, 효무제가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태안 10년(385년) 8월, 명재상 사안이 사망하자,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서 그의 장례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관해 논쟁이 있었다. 이때 서막이 중서령 왕헌지에게 사안의 장례식에 특별히 예의를 더해야 한다고 권하여 논쟁을 끝냈다. 이후 서막은 사부랑(祠部郎)으로 승진하였다.
태원 14년(389년) 11월, 예장태수 범녕이 15명의 의조(議曹)를 각 현에 파견하여 풍속을 조사하고 지방관을 심문할 권한을 수여받길 원했다. 범녕과 친분이 있었던 서막은 그에게 서신을 보내 완곡하게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을 제시하였으나 범녕이 듣지 않았다. 얼마 후, 서막은 중서시랑으로 승진하여 조서에 관한 업무를 전담하면서 효무제의 사사로운 친분이 더해졌다.
태원 20년(395년) 3월, 당시 회계왕 사마도자가 왕국보가 붕당을 형성하여 전횡을 부리니, 효무제가 이를 무척 껄끄려워 하면서 형제 간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친모인 문태후는 두 형제를 화해시켜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서막이 효무제에게 나아가 간했다. "과거 한나라의 문제는 반란을 획책한 회남왕 유장(劉長)을 용서하였고, 세조께선 제왕을 내쳤다가 후회한 바 있습니다. 비록 회계왕의 방탕함과 친압함이 도를 넘은 것은 사실이나, 마땅히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폐하와 회계왕 사이에 분분한 의견을 흩뜨리는 것이 밖으로는 국가를 위한 계책이고, 안으로는 태후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효무제는 서막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마도자와 화해하였다.
어느 날, 서막은 사마도자의 근무지인 동부(東府)에 들렀는데, 그때 사마도자는 여러 빈객들과 함께 술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서막을 본 사마도자가 말했다. "그대는 지금 통쾌하지 아니한가?" 서막이 답했다. "이 서막은 뒷골목의 서생이라 검소하고 수양하는 것만을 통쾌함으로 삼습니다." 사마도자는 서막의 검소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기분 나빠하지 않고 웃어 넘겼다. 이후 사마도자는 서막을 눈여겨 보고 장차 그를 쓰기 위해 이부랑으로 삼으려 했으나, 서막은 사마도자를 따를 뜻이 없어 간절히 사양하였다.
효무제는 황태자 사마덕종이 유약한 것을 걱정하여 그의 곁에 조정의 걸출한 문무관원을 붙이고자 하였다. 이에 효무제는 서막을 태자전위솔, 영본군대중정(領本郡大中正)에 임명해, 서막으로 하여금 사마덕종의 경전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후 서막은 동궁(東宮)에 근무하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입견하여 조정의 정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며 기존의 업무인 조서를 수리하는 일도 도맡아 하였다. 효무제는 그런 근면성실함을 기특히 여겨 서막을 김일제, 곽광에 비유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를 고위직으로 승진시켜 국가의 중대사를 맡기려 했지만, 미처 직위를 내리기도 전에 붕어하였다.
태원 21년(396년) 9월, 안제 사마덕종이 즉위하자, 서막은 표기장군에 임명되었다.
융안 원년(397년), 서막은 본래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아버지 서조가 사망하면서 크게 상심하여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결국 서막은 그 해를 넘기지 못 하고 얼마 안 가 숨을 거두었다. 향년 54세. 서막의 죽음에 지식인은 물론 마을의 백성들까지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서막의 장남 서활(徐豁)은 부친의 풍모가 있어 효로 이름을 날렸고, 조정에 임관해 태상박사, 비서랑을 역임하였다. 그 동생 서호(徐浩)는 산기시랑, 서양태수를 역임하다가 훗날 하무기와 함께 노순의 반란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효무제는 연회가 끝난 후 손수 조서를 써서 신하들에게 내리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 문장이 대체로 경박하고 난잡하였다. 그래서 서막은 조서가 내려지기 전에 그것을 받아 문장을 고쳤고, 효무제가 이를 다시 검토한 후 좀 볼만 하다 판단되면 비로소 조서를 내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