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당나라)
서호(徐浩, 703~782)
당대(唐代)의 서예가로, 자는 계해(季海)입니다. 월주(越州, 현재 저장성 사오싱시) 출신으로, 장구령(张九龄)의 조카입니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관직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벙왕부(彭王傅), 회계군공(会稽郡公), 태자소사(太子少师)를 역임했습니다. 젊은 시절 명경과(明经科)에 급제하였고, 숙종(肃宗) 시기에는 중서사인(中书舍人)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당대의 많은 조서(诏书)와 명령문은 서호의 글씨로 작성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국자감의 제주(国子祭酒)를 거쳐 공부시랑(工部侍郎), 이부시랑(吏部侍郎), 집현전학사(集贤殿学士)를 역임하며, 회계군공에 봉해졌습니다. 저서로는 《논서》(论书, 《법서론》(法书论)으로도 불림) 한 편이 있습니다.
서호는 어려서부터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의 조부 서도(徐师道)와 부친 서교지(徐峤之)는 모두 유명한 서예가였으며, 서호는 이들로부터 가문의 서예 전통을 전수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이왕(二王)"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献之)의 서체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왕헌지의 서체에 심취했습니다. 서호는 팔분서(八分书), 행서(行书), 초서(草书)에 능했으며, 특히 해서(楷书)에 뛰어났습니다.
《이헌 묘지명》(李岘墓志)
《이헌 묘지명》**의 정식 명칭은 **《당고광록대부검교병부상서겸구주자사충본주단련사증태자소사상주국양국공이헌묘지명》(唐故光禄大夫检校兵部尚书兼衢州刺史充本州团练使赠太子少师上柱国梁国公李岘墓志铭)**입니다.
이 묘지명은 2000년에 시안시(西安市) 장안구(长安区) 곽도진(郭杜镇)에서 출토되었으며, 동시에 《이헌의 부인 독고준 묘지명》(李岘妻独孤峻墓志)도 함께 발굴되었습니다. 현재 두 묘지명은 장안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묘지명은 정사각형 청석(青石)으로 제작되었으며, 한 변의 길이는 91cm, 두께는 14cm입니다. 전체 32행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행에는 33자가 가득 차 있습니다. 총 글자 수는 1053자이며, 서체는 해서(楷书)입니다.
내용 및 역사적 중요성
《이헌 묘지명》은 이헌의 일생 동안의 관직 변동 및 공적을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구당서》(旧唐书)와 대체로 일치하나, 일부 차이가 있습니다. 묘지명에서 "영태 2년(永泰二年, 766년) 7월 8일,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55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헌이 현종 선천 원년(712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당서》(新唐书)와 《구당서》는 그가 58세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묘지명의 기록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서호는 이헌보다 9살 연상이었으며, 《이헌의 부인 묘지명》 또한 서호가 작성하였습니다(천보 13년, 754년). 서호가 이헌의 묘지명을 작성하고 서문을 썼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금석췌편》(金石萃编)에 기록된 《서호비》(徐浩碑)의 발문에서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헌의 묘지명이 기록한 연령이 정확하며, 이는 정사(正史)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