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히로요(大内 弘世 おおうち ひろよ)

Encyves Wiki
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5년 1월 4일 (토) 08:44 판 (새 문서: 오우치 히로요(大内 弘世 おおうち ひろよ) 덴주 6년/고랴쿠 2년 11월 15일(1380년 12월 12일))는 일본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무장으...)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오우치 히로요(大内 弘世 おおうち ひろよ)

덴주 6년/고랴쿠 2년 11월 15일(1380년 12월 12일))는 일본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무장으로,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로써 스오(周防) ・ 나가토(長門) ・ 이와미(石見) 지역을 슈고(守護)로써 다스렸다

다타라(多々良)를 혼세(本姓)로 하는 오우치씨(大内氏)의 제9대 당주로 히로유키(大内弘幸)의 아들이며 요시히로(義弘)、미쓰히로(満弘)、모리미(盛見)、히로시게(弘茂) 등의 아들을 두었다.

오우치씨는 북조(北朝)를 지지하며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따랐으나,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이라는 막부의 내란으로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와 대립하던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가 남조(南朝)에 항복하고, 일련의 다툼을 거친 끝에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사이의 화해에 이어 남북 조정 사이에 일시적인 화의인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이 성립되었다. 오우치 씨는 남조와의 화목이 결렬된 뒤에도 다다요시와 그 양자(다카우지의 서자) 아시카가 다다후유(足利直冬)를 지지하였고, 히로요는 남조의 무장으로써 미쓰요시 친왕(満良親王)을 받들어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쇼헤이(正平) 5년/간노(観応) 원년(1350년) 아버지 히로유키(弘幸)와 함께 히로요는 막부가 임명한 스오 슈고직이었던 와시즈씨(鷲頭氏)를 치러 나섰다. 와시즈씨 역시 오우치씨와 마찬가지로 다타라를 혼세로 하며 오우치 씨의 입장에서 보면 서류 가문이었다. 오우치 히로요는 스오 현지의 도다이지(東大寺) 소유 영지였던 요시키군(吉敷郡)의 후시노장(椹野荘)에 난입해 남조에 귀순할 의사를 보였고, 이듬해 7월에 실제로 남조 귀순을 행동으로 옮겼다. 남조로부터 오우치 히로요는 스오의 슈고직에 임명되어 숙원을 이루기는 했지만, 와시즈씨는 여전히 건재했다.

오우치씨 일족의 통솔

오우치 히로유키는 와시즈 공격을 완수하지 못한 채 쇼헤이 7년/간노 3년(1352년)에 숨을 거두었다. 가독을 이어받은 히로요는 스오 평정을 서둘러서 쇼헤이 7년/간노 3년(1352년) 2월 19 ・ 20일、쓰노 군(都濃郡) 와시즈 장(鷲頭荘) 시라사카산(白坂山)에서 와시즈 나가히로(鷲頭長弘)、나이토 후지토키(内藤藤時)와 전투를 벌였다. 이어 윤2월 17일에는 고시가키(高志垣), 윤2월 19일과 3월 27 ・ 28일에는 구마게 군(熊毛郡) 아라야 가와치 마나오(新屋河内真尾), 4월 9일부터 29일에 다시금 쓰노 군 와시즈 장 시라사카 산, 나아가 8월 3일에도 와시즈 나가히로 등과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쇼헤이 8년/분나(文和) 2년(1353년) 와시즈 씨와의 강화로 와시즈 일파를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된다.

오우치 히로요가 스오 평정을 서둘렀던 배경에는 쇼헤이 7년/간노 3년 즉 분나(文和) 원년(1352년)에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다자이후(大宰府)에서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에게 패하고 나가토국(長門国)으로 철퇴한 것, 그 잇시키 노리우지도 남조측의 기쿠치 씨(菊地氏)에게 패하고 나가토 슈고(長門守護)였던 고토 씨(厚東氏)는 잇시키 노리우지를 지원하는 슈고(당주) 고토 요시타케(厚東義武)와 아시카가 다다후유를 지원하는 고토 다케후지(厚東武藤)로 갈라져서 오우치 씨를 둘러싼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