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서문시장(西門市場 | Seomun Market)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큰 장인 서문시장의 과거와 현재.
조선 중기에 생겨난 대구의 서문시장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커다란 장터라는 의미로 ‘큰 장’으로도 불린다. 대구 최대의 전통시장 서문시장은 낮에는 큰시장, 밤에는 야시장을 통한 먹거리 상품화가 성행하고 있다.
[대구장에서 서문 전통시장으로] 대구광역시의 대구도시철도 3호선 모노레일을 타고 대봉교역에서 칠곡 경북대학교병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여어가 대구의 큰 장, 서문시장 아인교”라는 안내 방송과 함께 여러 승객들이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대구도시철도 3호선에서 이용객이 가장 많은 서문시장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서문시장 관광 안내 센터’가 있다. 서문시장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굽이굽이 명소가 숨어 있으며 면적이 방대하므로 처음 방문한 사람이 시장을 속속들이 둘러보기는 쉽지 않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일원에 있는 서문시장의 대지면적은 3만 4974㎡, 건물 연면적은 9만 4244㎡이다. 1지구, 2지구, 4지구, 5지구, 동산상가, 건해산물상가 등 6개 지구로 구성되고, 약 4,5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다. 노점 620곳을 더하여 상인 수만 해도 2만여 명이다. 서문시장의 북쪽과 서쪽에 있는 대신지하상가는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4동까지 뻗어 있다. 매일 7만 명의 손님이 드나드는 대구경북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인 서문시장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문화 관광 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서문시장의 역사는 대구의 운명과 맥을 같이하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조선 8도에 물자 조달이 급격히 필요하면서 시장 또한 번성하였다. 특히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어 대구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되고, 1669년(현종 10) 낙동강 좌우 도로로 분리되어 있던 경상도가 통합됨으로써 대구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 또한 1677년(숙종 3) 대동법 실시로 현물 납부를 포와 쌀로 대체함으로써 시장 기능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구읍성의 북문 밖에 있던 대구장을 경상감영의 서문 밖으로 이전하면서 시장 이름도 경상감영 서문 밖에 있다 하여 ‘대구 서문시장’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대구장이라 불리며 평양장, 강경장과 더불어 전국 3대 장터로 손꼽혔는데 특히 경상도 내의 5일장들을 연결하여 주는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1922년에는 서문시장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재정비되면서 위치도 옮겨진다. 원래 천왕당지(天皇堂池)가 있던 자리에 고분군(古墳群)의 흙을 메움으로써 장터를 만든 것이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 온 서문시장은 광복 이후 6·25전쟁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또 한번 도약하게 된다. 6·25전쟁 기간 중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대구에는 피난민들이 몰려 인구가 급증하였고 군사 중심지의 위용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가 세워 놓은 섬유공장도 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시장의 역할이었다. 휴전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폐허를 되살리기 위하여 섬유 산업을 육성하였다. 대구가 섬유도시로 거듭나는 동안 서문시장은 전국 최대의 의류 도매시장으로 재탄생하였다. 대구 지역 섬유 도매상의 절반 이상이 전국 최고의 포목 판매시장이 된 서문시장에서 영업하게 된 것이다. 서문시장의 직물 도매업은 금세 전국 섬유시장을 석권하였다. 피난민들 또한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하여 서문시장에서 생업을 찾아 나섰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모여들자 시장은 늘 북적였다. 서문시장의 주거래 품목은 여전히 주단·포목 등 섬유 관련 품목이며 전국적으로도 원단시장이 유명하다. 서문시장은 대구 최대의 전통시장답게 매일 시민들로 붐비다 보니 정치인들이 홍보를 위하여 찾는 장면도 종종 목격된다.
[배고픈 날엔 서문시장으로 가라] 경부선 철도가 놓이며 물류 이동이 용이하고, 6·25전쟁으로 미국의 구호물자였던 밀가루가 쏟아지자 대구는 국수 생산에 앞장서게 된다. 분지 지형으로 더운 데다 강수량도 적어 국수가 자연 건조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어 대구는 자연히 국수 생산지로 각광받았다. 1980년대 초까지 전국 국수 생산량의 60% 이상이 대구에서 나왔으니 가히 국수의 도시라 부를 만하다. 많이 생산하는 만큼 소비도 많아 대구는 전국 최대의 국수 소비량을 기록하는데 타 도시에 비해 3배나 많은 양을 소비하였다. 이미 1933년 풍국면 국수공장이 설립되었으며, 삼성상회의 별표국수 등 국수 회사들이 대구에 터전을 잡았다.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국숫집이 서문시장 곳곳에 들어서게 된다. 50여 곳의 칼국숫집이 줄지어 서 있는 서문시장 칼국수골목은 연중무휴로 붐빈다. “칼제비 할머니”라고 부르면 수십 명이 돌아볼 정도로 서문시장에는 칼국숫집이 넘쳐난다. ‘칼제비’는 칼국수와 수제비의 합성어로, 서문시장 제1지구와 제4지구를 이어 주는 육교 아래에 있는 국수골목에서 판다. 청방배추가 푹 삶기도록 끓여 낸 칼국수 국물 안에 아무렇게나 툭툭 뜯어 넣은 수제비가 별미이다. 곁들여 나오는 반찬은 풋고추, 된장, 김치가 전부이지만 저렴한 가격에 양이 풍부하다 보니 서문시장의 칼제비국수는 점심시간에 줄을 서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국수 외에도 떡볶이, 순대, 돈가스, 납작만두, 유부전골, 양념오뎅, 호떡이 항시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때문에 식사 시간대를 피하여 가는 것도 서문시장 맛집을 차지하는 팁이라 할 수 있다. 늘 장사진을 이루는 서문시장에 도시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대구 시민의 발길도 더욱 잦아진 데다 타지 관광객들의 접근도 용이해졌다. 노인들의 단골 명소이던 서문시장은 최근 들어 SNS 바람을 타고 청년들의 핫스폿이 되면서 더욱 생기가 돌고 있다.
[슬픔도 기쁨도 함께 한 서문시장] 1922년 일제는 대구 달성 고분군 등 문화재를 훼손하여 파헤친 흙을 커다란 못에다 가져다 부었다. 대구 각지에는 달성 고분군, 비산동 고분군, 대명동 고분군 등이 있었으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공원이 조성된 불로동 고분군만 남아 있다. 고분의 흙으로 못을 메워 세운 서문시장에는 궂은 일이 종종 생겼다. 특히 대형 화재를 겪고 극복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서문시장 화재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1960년대에 일어난 큰불로 시장 전체가 전소된 적이 있다. 그리고 1975년 11월 20일 서문시장 제4지구가 큰불로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0여 년이 지난 1996년 11월 1일에는 서문시장 제2지구 1층 배전판에서 전기 합선으로 추정되는 불이 났다. 이듬해인 1997년 7월 30일에도 누전으로 추정되는 불이 나 서문시장 제2지구 남쪽 건너편 건어물전 밀집 지역에서부터 화재가 발생하였다. 2005년 연말인 12월 29일에는 서문시장 제2지구에서 일어난 큰불로 1,000여 개 점포가 전소하고 683억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2016년 11월 30일에는 서문시장 제4지구의 큰불로 679개 점포가 전소하여 피해 금액이 469억 원에 달하였다. 2016년 11월 30일 새벽 2시 8분에 발생한 화재는 이틀이 지난 12월 2일 낮 1시 8분에 진화되었다. 무려 58시간 57분 만에 완진된 것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건설안전과에서는 서문시장 화재 사건을 담은 백서를 발간하여 안전사고 대처의 매뉴얼로 삼고자 하고 있다. 이 백서는 서문시장 제4지구 화재 발생 시점부터 제4지구 건물 철거까지의 상황 대처와 사고 수습 등 전 과정을 담아 향후 유사한 재난 발생 시 참고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화재 피해 초기 대응과 수습, 기관별로 대응한 과정과 피해 상인 지원, 향후 재난 대비 개선 사항 등을 수록함으로써 사고의 발생부터 수습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담았다. 특히 전기로 인한 화재 사고가 다수이므로 화재 안전대책이 항시 요구되고 있다. 2020년 9월 11일 오전 7시 30분 서문시장 제2지구 1층 가방가게에서 이유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다행히 신축 건물이라 소방시설이 완비되어 있어 스프링클러가 제때 작동하여 불이 진화되었다. 가방가게의 일부가 소실되긴 하였지만 인명 피해가 없었기에 소방시설을 갖춘 혜택을 톡톡히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문시장 키다리아저씨] 2003년부터 대구광역시 수성구청에 쌀을 10톤 트럭째로 기부하는 노인이 화제였다. 해마다 한가위가 다가오면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구민운동장에 10톤 트럭 한 대가 도착한다. 10㎏짜리 쌀 2,000포대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노인의 당부에 수성구청 직원들은 복지관, 경로당 등에 나누어 주기 위한 작업을 하였다. 흔치 않은 기부에 공무원들이 노인의 인적 사항을 알아내고자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여 공무원들 사이에서 ‘키다리 아저씨’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노인의 키는 160㎝도 안 되는 왜소한 체구이지만, 동화 속에서 선행을 베푸는 ‘키다리 아저씨’를 연상한 것이다. 노인은 1911년생에 박씨 성을 가졌고 고향이 평안남도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6·25전쟁 와중이던 1·4후퇴 때 41세의 나이로 월남한 뒤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대구 서문시장에서 양복 옷감 도매상을 하며 제2의 삶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1970년 서문시장에 불이 나 ‘키다리 아저씨’의 가게도 소실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대구 시민들이 기탁한 성금으로 도움을 받은 것에 크게 감사함을 느껴 ‘형편이 나아지면 반드시 이웃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남은 생애 동안 어려운 이웃에게 쌀 배달부가 되는 것이 바람이라던 노인은 2014년 5월,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자녀들이 아버지의 당부를 이어받아 해마다 기부의 규모를 늘려 10㎏짜리 쌀 2,000포대와 라면 1,200박스를 기증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하는 선친의 방식도 고수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청은 기부받은 쌀과 라면을 관내 주민센터와 경로당 60곳, 사회복지시설 41곳, 새터민 가정, 무료 급식소 등에 나누어 주고 있다.
[낮에는 큰시장 밤에는 야시장] 2016년 6월부터는 밤에도 서문시장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침부터 시작하는 큰시장이 문을 닫은 후 야시장을 개장하는 것인데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운영하고 있다. 총 350m의 길이에 달하는 대형 야시장으로 80여 개의 간이 포장마차가 펼쳐진다. 야시장은 매달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대구 시민과 방문객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하나야키, 삼겹살김밥, 도도감자, 나뭇잎만두 등 인기 메뉴를 파는 포장마차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지만 기다리는 사람도 지나가는 사람도 야식 문화의 분위기를 즐기는 표정이다. 야시장 내에는 특색 있는 술집과 버스킹 공연도 있어 맛있는 음식과 함께 길거리 축제도 즐길 수 있다. 먹거리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상품을 파는 곳도 있어서 찾고 싶은 명소가 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서문시장을 전국 단위의 대표 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하여 택배 배송시스템을 구축하여 각지에서 주문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관광 안내 센터를 야간에도 운영하여 이용객들의 편의성을 높이고 있다. 스마트폰 세대를 위하여 서문시장 전용 앱을 개발하였고, 전통시장에는 드문 카드 결제 시스템, 인근 한옥게스트하우스 등이 갖추어져 있어 서비스 면에서 충실함을 확보하고 있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로부터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되며 자타가 인정하는 관광 명소 자리 잡았다. 대구광역시는 2020년 10월 대구관광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해외 채널을 통하여 외국인 관광객이 추천하는 ‘대구 핫플레이스’를 설문하였다. 1,834명이 참여한 이벤트 결과 대만 관광객들은 서문시장을 1위로 꼽았다. 대만 관광객은 대구를 방문한 외래 관광객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서문시장에 대한 선호도가 남달랐던 것이다. 글로벌해진 서문시장 덕분에 젊어진 고객을 겨냥하여 상인도 점차 젊어지는 추세이다. 서문시장에 프랜차이즈 카페만 해도 20곳이 넘어 여느 관광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