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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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藥脯)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고기를 다져서 힘줄을 없애고, 진간장, 생강, 파 다진 것, 후추, 꿀로 양념하여 꽃처럼 얇게 펴서 말린다고 하였다. 오래 두고 벌레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를 쐰다고 하였다.

『음식디미방』에서는 비올 때 독 안에 널어 말리거나, 더울 때 물가의 반석 위에 널어 말리라고 하였고, 연기를 쐬면 벌레가 안 난다고 한 것으로 이미 훈연법(燻煙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드는 방법은 우둔살을 얇고 넓게 결대로 저며서 양념간장(진간장·설탕·후추·참기름)에 담가서 간이 배어들면 채반에 널어 햇볕에 말리되, 여러 번 뒤집고 반듯하게 말린다. 상에 놓을 때에는 참기름을 바르고 살짝 구운 다음 썰어서 잣가루를 묻힌다.

폐백용으로는 다져서 반대기 지어 말려서 위에 잣가루를 얹는다. 다져서 대추모양으로 빚어 잣을 꽂아 말리면 대추포이고, 동글납작하게 빚어 잣을 박아 말린 것은 칠보포라고 한다. 안주나 반찬으로 좋은 음식이다.

고성 이씨 부인은 중종 34년(1539년)에 나서 광해군 7년(1615년)까지 살았던 시각장애인으로,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냈으며, 약식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은 명종 때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와 결혼하여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 을 낳았고 사후에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고성 이씨 부인에 대한 일화는 『한국야담사화전집』에 실려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조선 중기 학자로 이황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류성룡과 김성일 등과 동문수학했던 남편 서해와, 6도의 관찰사와 판서를 두루 역임한 아들 서성과 관련된 자료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옛날 옛적 장애위인 시리즈>는 역사 속 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그때 장애 인물들의 삶을 통해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비롯한 전반적 문제점들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를 돕고자 도서출판 솟대가 발간한 시리즈이다.


5세에 불의의 사고로 실명한 이씨

우선 『한국야담사화전집』에 따르면 고성 이씨는 원래 일반 사람들과 다름없이 태어났으나, 5세 때 여종의 불찰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약에 쓰려고 달여 놓은 부자탕(附子湯)으로 얼굴을 씻다가 그만 그 물이 두 눈에 들어가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는 어려서 용모가 아름답고 재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실명하게 된 것이다. 이때 누구보다 고성 이씨의 장래를 걱정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고성 이씨 부인의 아버지 이고는 딸이 장애를 얻게 된 것을 자신의 불찰 때문이라 생각하고 늘 딸을 불쌍히 여기며 장래를 걱정 하였다. 특히 딸의 혼인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재질이 뛰어나고 총명한 딸을 사랑해 줄 배필을 구해 주고자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옛날에도 장애가 있는 여성에게는 혼처를 구하는 데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고성 이씨가 서해를 남편으로 맞이할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고성 이씨 부인이 나이가 들어 혼인할 시기가 되자, 그의 아버지 이고는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딸이지만 하늘이 점지한 여중군자라 여기며, 어떻게 해서든지 시집을 보내 이생의 원한을 없게 하고자 하였다.

“내 딸은 하늘이 점지하신 여중군자이나 불의의 화벌로 저 지경이 된 것은 그 애의 죄가 아니요 내가 내리는 화벌인즉 내 어찌 안여하랴. 이는 필시 하늘이 그 애의 명예와 복록을 더욱 빛나게 하시려는 뜻에서 저같이 아름다운 재모와 성행에 한 가지 험사를 가미하신 것이다. 어느 적덕한 가정에 들어가 가문을 창대히 만들고 좋은 자손을 내어 이름을 크게 하려고 이같이 고맙게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즉 저 아이의 혼처는 명문거족의 혁혁한 자손 중에 보내는 것보다는 시골구석의 한사 빈족이라도 반드시 훌륭한 덕행과 장래가 있을 위대한 좋은 청년을 물색하여 부부의 합력으로 그 문호를 크게 중흥시킬 사람에게 보내어 이 복을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정창권(2011),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글항아리, 381면.

본래 고성 이씨 부인의 아버지 이고는 안동의 명절(名節)로 이름난 임청각(臨淸閣) 이명의 다섯째 아들 이었다. 명문가의 사람이었던 그는 사윗감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명문거족의 자손보다는 시골의 가난한 선비라도 덕행과 장래가 촉망받는 청년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 이유는 딸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딸에게는 남다른 재덕과 미모, 총명함이 있기 때문에 좋은 짝을 맺어 주면 가문을 번성시키고 자손도 훌륭하게 키워 낼 것이라 생각했다.

퇴계의 제자인 서해를 남편으로

그 무렵 가까운 곳에 퇴계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고는 퇴계 문하에 인재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서 찾아가 퇴계 선생에게 간절히 낭재(郎材) 추천을 부탁했다. 그러자 퇴계 선생은 사정을 듣고 나서 당시 장래가 촉망되던 서해를 추천해 주었다.

“부탁하는 처지는 잘 이해하겠으나 사실을 밝힌다면 누가 일부러 병신 아내에게 구혼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악의를 가지고 남을 속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로되 불구자란 말은 처음부터 드러내지 말고 신랑감을 구하세. 내 문하에 서해라는 젊은이가 있는데, 그의 재학(才學) 과 심성덕행(心性德行) 을 내가 깊이 사랑하여 포은(圃隱) 이나 정암(靜庵) 두 선생에 비길 수 있고 장래에는 세상에 이름을 떨칠 유학자가 될 것이니 이 사람에게 먼저 구혼하게. 그러면 나도 전력을 다하여 추진할 것이네.” 정창권(2011), 같은 책, 같은 곳.

예문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옛날에도 장애가 있는 사람은 결혼에도 많은 제약이 따랐던 듯하다. 그래서 퇴계는 실명한 색시를 맞이할 사람은 없을 테니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말것을 당부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제자 중에 가난하지만 큰 학자가 될 서해를 추천해 준 것이다. 당시에 서해는 예조참의를 지냈던 서고(徐固, ?~1550) 의 아들로, 일찍 양친을 여읜 후, 명종 8년(1553년)에 서울에서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와서 살고 있었다.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었던 서해는, 일찍부터 성리학에 밝아 20세 때에 이미 그의 문장과 학식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결국, 이고는 딸이 맹인이라는 것을 속이고 매파에게 부탁해 혼사를 정하게 되었고, 그후 혼인은 순조롭게 성립되었다.

그 당시 혼인은 양가 부모들이 정하고 신랑은 결혼식날 신부집에 와서 예식을 치르는 것이었 다. 그러고 나서 첫날밤을 치러야 신랑과 신부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때 신랑 서해는 혼례가 치러지는 마당에서 신부의 얼굴을 언뜻 볼 수 있었는데, 치장한 신부의 얼굴은 곱고 아름다울 뿐이었다. 신부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는데, 신부는 보통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밤이 되고서야 비로소 서해는 신부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자기를 속인 것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선비라는 점 때문이란 생각에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서해는 이만한 일에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또 말없이 앉아 있는 신부를 살펴보니 신부가 몹시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보고는 도리어 미안하여 부드럽게 위로하였다.

“부인은 겁내지 마시오.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 위인이나, 어찌 그 조그마한 과실로 부인을 괄시하겠소. 잠깐 보아도 부인의 단정하고 현숙한 재덕은 용모의 아름다움에 못하지 않으니, 우리 집과 내게는 오히려 과분한 복택이 되거늘 내가 어찌 부인을 소홀하게 대우하겠소. 다만 내집의 방조 되시는 사가정(四佳亭) 선생의 하세(下世) 후로 한미하고 영체하며 형세가 극히 빈궁하여 호화롭게 생장한 부인에게 괴로움이 많을 것이니 이것이 부끄럽소.” 앞의 책, 382면.

남편 서해는 다정스럽게 부인을 위로하고는 불편함이 없도록 자기 집안일을 숨김없이 가르쳐 주었고, 친척들을 어떻게 대하고 처신할지를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이에 고성 이씨 또한 크게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자상함에 평생지기를 만난 듯했다.

“선비들은 나를 알아주는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조차 돌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나이다. 이제 군자께서는 첩이 큰 병신인 것과 부모들이 속이고 청혼한 죄과를 잊어버리시고 오히려 하해와 같으신 도량으로 첩을 버리지 않겠다 하오시니, 이 은덕은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시거늘 첩이 어찌 감히 죽음으로써 군자께 이 은혜를 갚기를 사양하오리까? 변변치 못한 인간이오나 측근에 있는 것을 허락하시니 첩은 참으로 황송 감격하여 사뢰올 바를 알지 못하겠나 이다.” 같은 책, 382~383면.

약봉 서성 종가

이렇게 두 사람은 군자와 숙녀의 백년가약으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여 비할 데 없이 화목하 였다. 고성 이씨의 부모도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비로소 크게 안심하였으며, 사위에게 딸이 소경인 것을 밝히지 않은 것을 사죄하고 딸의 신세를 축원해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첫날밤 신부가 앞을 볼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된 서해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총명한 신부가 신랑의 마음을 꿰뚫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첩이 전생에 죄가 있어 눈먼 몸이나 외람되게 낭군을 섬기고 싶어 혼인을 스스로 사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떠한 미움과 죄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이를 속이신 부모님은 오직 이 한몸을 불쌍히 여겨 옳지 않은 줄 아시면서도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낭군께서도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이를 헤아려 아실 것이옵니다. 모든 죄는 이 한 몸이 지겠사오니 첩의 부모를 탓하지 말아 주옵소서. 이 몸이 진작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하심을 저버리고 불효의 죄를 짓지 아니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을 당하고 보니 진작 죽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옵니다. 다행히 낭군께서 첩의 죄를 용서하시고 비 들고 뜰 쓰는 소임을 맡겨 주신다면 이는 첩의 부모와 첩 세 사람을 살리시는 큰 은혜가 되겠지만 감히 어찌 이를 바라겠습니까?” 안춘근(2002), 『역사를 빛낸 한국의 여성』, 범우사, 168~169면.

서해는 신부의 현숙한 태도와 조리 있는 말에 크게 감동하기도 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런데 신부가 갑자기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며 자결하려 하자, 문 밖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이씨의 부모가 급히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신랑에게 사죄하였는 데, 신랑이 도리어 이씨 부모를 위로하고는 첫날밤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고성 이씨의 부모는 딸의 장래를 위해 맹인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결혼시켰 으며, 남편 서해도 고성 이씨의 재모와 언행을 알아보고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후로 서해는 고성 이씨를 측은히 여기고 아끼며 사랑하였다. 그래서 이고도 사위와 딸을 위하여 소호헌(蘇湖軒)을 물려주었다.

현재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대구 서씨 종중 소유의 소호헌은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서해가 거처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건물을 지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고의 분가 주택으로 지은 것을 사위인 서해에게 물려준 집이라고 전해진다. 안채에서 명종 13년(1558)에 고성 이씨가 아들 서성을 낳은 곳이다. 이처럼 고성 이씨와 서해 부부는 처가살이를 하며 살고 있었다.

약현으로 이사한 후 약과약식을 만들어 판매

그러나 화목하고 다정했던 신혼의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성이 생후 1년 반이 못 된 명종 14년(1559) 서해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는 남편을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 앞 못 보는 과부의 처지에 어린 아들과 함께 생계를 꾸려 나갈 일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슬픔에 잠겨 있지 않았다. 고성 이씨 부인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남편의 사랑에 대한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하고는, 명종 15년(1560)에 세 살 된 아들 서성을 데리고 남편의 본가가 있는 서울 약현(藥峴)으로 이사했다.

약현에는 서엄의 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를 통칭)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에는 서씨 집안에 서성의 중부(仲父)인 춘헌공(春軒公) 서엄(1529~1573) 내외만 있었고, 아직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백부(伯父)인 서대(徐岱) 내외가 몇 달 사이로 별세했는데, 그들에게도 역시 자녀가 없었다. 서씨 가문엔 장수한 사람이 드물었던 것이다. 고성 이씨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친정에서 빌려 온 약간의 자금으로 남녀 하인과 함께 청주(淸酒)를 빚고, 유밀과(油密果)와 찰밥, 강정, 산자, 다식 등을 만들어 팔았다.

정성을 다해 다른 집보다 질이 더 좋게 술과 과자를 만들고 찰밥에 밤과 잣, 호두 등을 넣어 맛있게 빚어 내놓았다. 그러자 평판이 좋아 서울 장안 사람들이 고성 이씨 부인이 만든 술과 과자 및 찰밥을 다투어 사갔고, 그곳의 약주약과, 약식 없이는 잔치가 되지 않을 만큼 유명해졌다.

당시 고성 이씨 부인의 집은 현재 서울 중림동 천주교회(약현성당)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집에서 만든 청주를 약주(藥酒), 찹쌀로 만든 밥을 약밥(약식, 藥食), 유밀과(油密果)를 약과(藥果)라 불렀는데, 이것은 약현이란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서성이 관례를 치르고 호를 약봉이라 한 것도 약봉이 살던 곳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한편, 이씨 부인은 가정경제를 꾸려가면서도 아들 교육에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바른 언행은 물론 글도 읽히게 하였다.

서성은 어린 시절 나이에 비하여 매우 총명하였는데 서울로 이사 와서 10여 년을 중부(仲父)인 서엄에게 학문을 배우다가, 성장한 뒤에는 귀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했다. 그때부터 서성은 김장생, 심지원 등과 교우하게 되었고 그의 문장과 학식도 크게 발전하여 20세에는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당시 이름 높은 선비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서성은 선조 19년(1586)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판서가 되어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손끝으로 느껴 사물의 이치를 아는 지혜로움

고성 이씨 부인은 생전에 약현에 큰 집을 지었는데, 그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집을 지을 때의 일화도 몇 가지가 전해진다. 우선 서성이 출세하기 전에 고성 이씨 부인은 약현에다 안동 소호리 친정집을 본떠 큰 제택을 먼저 꾸민 것이다. 서수용(2007), 『종가기행』, 한국일보사, 283면.

아마도 서성의 중부인 서엄마저 죽고 난 이후 무렵인 듯하다. 서엄 역시 자식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은 단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분수에 넘치는 큰 집을 짓는다며 비난할 정도였다. 당시 서씨 가문에는 장수한 사람이 많지 않아 가족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성 이씨는 오히려 이웃 사람들의 비웃음을 단번에 불식시켰다.

“우리 집안이 지금은 이렇지만, 훗날 창대해져 이 집도 협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서수용(2007), 같은 책. 이씨 부인은 집안이 번성할 것을 자신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왕궁에서 이씨 부인이 거처할 집을 약현에 신축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특별히 자손이 번창할 것을 고려하여 대청 30간을 세웠더니 이씨는 지팡이를 짚고 두루 순시하다가 마루에 이르러 아들을 불러 탄식하기를 “지금이라도 내가 죽으면 내 손자 손녀가 이 대청에 들어서서 제사 지내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2~3대를 내려가는 동안에 내 자손이 몇 백 몇 천이 될 수도 있으니 이것은 대청이 아니고 소청이 될 것이다. 마당에 보계를 매지 않고는 안 될 것을 누가 이렇게 설계하여 꾸몄느냐?”하였다. 정창권, 앞의 책, 387~389면.

어느 쪽이 맞는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집을 지을 당시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만큼 포부가 대단한 여장부였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은 또 있었다. 시각장애인이 그러하듯, 고성 이씨 부인도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사물을 본듯이 아는 것이 많았다. 고성 이씨 부인은 집을 짓게 되었을 때 직접 감독하였는데 앞을 볼 수 없으면서 관여하는 것이 많아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목수가 대청 기둥을 거꾸로 세웠다.

그런데 고성 이씨 부인은 손으로 만져 보고 나서 목수를 불러 마치 본 것처럼 그 잘못됨을 책망하였는데, 이 일로 목수들은 다시는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앞은 볼 수 없었지만, 손끝으로 느끼는 감각이나 사물의 이치를 아는 지혜는 누구보다 뛰어났던 것이다.

[[고성 이씨 부인][의 소망은 생전에 실현되었다. 서성이 선조 19년(1586) 과거에 급제하고 광주목사 (廣州牧使)를 지낸 송영(宋寧)의 딸과 혼인하고 나서는 자손이 번성하여 모두 벼슬을 하게 되자, 그 커다란 집은 좁기만 했다. 직계 자손 중에는 문과 급제자가 123명에 이를 정도였다.

서성은 7남 4녀를 두었는데, 고성 이씨가 칠순 때를 기준으로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있었다. 고성 이씨의 큰 손자 서경우가 우의정에 올랐고, 끝손자 서경주가 선조의 장녀 정신옹주에게 장가들어 달성위가 되었다.


집안 다스림과 자손의 가르침에도 법도와 정도를 좇았기에 고성 이씨 부인은 이웃과 친척들에게 공경과 칭찬을 받게 되었다. 고성 이씨 부인은 77세의 수를 살면서 부귀와 복을 누렸다. 비록 어려서 시각을 잃고 젊어서는 과부가 되었지만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였으며,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 낸 어머니이자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장애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에 대한 능력을 다시금 주목하게 한다. 가문을 크게 일으키고 사업적 수완까지 보였던 고성 이씨 부인은 신사임당 이상으로 주목해야 할 인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