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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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균(徐興均)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개설

서흥균(徐興均)[?~?]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 문회(文會)는 특별총회를 열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17일 광문사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와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가 설립되었다. 이후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가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 금연상채회에서 활동하던 서흥균(徐興均)은 국채보상운동이 침체에 빠지자 서상돈·이종면(李宗勉)·최영환(崔永煥)·채두석(蔡斗錫) 등과 함께 1909년 10월 15일 자 『황성신문』과 10월 19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하는 공고문을 게재하였다. 서흥균은 11월 7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표자회의에 서병규(徐炳奎)·정해진(鄭海鎭) 등과 함께 대구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11월 13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서상돈·서병규·정해진·이일우(李一雨) 등 10명과 함께 대구군에서 모은 국채 담보 의연금은 대구에서 공익을 위하여 사용하겠다는 광고를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