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권회복단
1915년 2월 28일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신상태, 남형우, 김재열, 홍주일, 박영모, 이영국, 김규, 정순영, 서병룡, 황병기 등 13인의 대구 청년들이 안일암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시회(詩會)를 가장해 모였다.
당연히 시를 짓는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오랜 회의 끝에 부서별 책임자를 정했다.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과 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과 서병룡, 권유부장 김규, 유세부장 정순영, 결사부장 황병기가 선임되었다.
시회를 가장하고 모여 항일비밀결사 창립
군사조직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총대장의 직책명을 단장이 아니라 통령으로 정했다. 통령에는 (스물다섯 이른 나이에 군수까지 지낸) 윤상태가 추대되었다. 조직 내정 후 결성식을 치렀다.
결성 행사는 수천 년 역사의 자랑스러운 나라를 한일병합으로 망하게 만들었다는 부끄러움을 단군 태황조(太皇祖)께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충격과, 놈들의 잔인무도한 무단정치에 짓눌려 우리 민족이 강력한 독립운동을 펼치려는 마음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 시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결의가 필요하다는 데 합의, 다섯 항에 이르는 맹서에 서약도 했다.
첫째, 우리는 한국의 국권 회복에 앞장선다!
둘째, 매년 정월 15일 단군의 위패 앞에서 목적 수행을 위해 기도한다!
셋째, 단원은 결코 이 결사항일조직을 탈퇴하지 않는다!
넷째, 단원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만약 이를 위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이 내리는 벌을 받을 것이다!
다섯째, 결사대를 조직해 일제와 친일 반민족 주구들을 살육한다!
창립을 마친 단원들은 각각 큰돈을 내놓아 그것을 상해임시정부와 만주로 보냈다. 회원 추가 모집과 모금 활동에도 나섰다. 회원들이 독립운동자금을 내놓는 행동도 훌륭한 일이지만 우리 민족 구성원들 다수가 십시일반 마음과 힘을 보태도록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라는 판단에서였다.
창단 반 년 만인 8월 25일에는 경북 영주 풍기광복단 등 다른 여러 단체들과 합세해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광복회도 결성했다.
1915년 8월 25일 광복회 결성으로 확대 개편
조선국권회복단은 김재열, 정순영, 이시영, 변상태, 정운일, 홍주일, 황병기, 박상진 등 강성 단원들을 광복회 지도부에 결합시켜 두 갈래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6년 5월 악명 높은 전라도 친일부호 서도현을 처단하고, 9월 4일 대구 부호 서우순의 집을 습격했다.
광복회는 그 후에도 경북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 일본 헌병대 공격, 망명 독립운동가들에 군자금 전달, 독립군 희망 청년 만주 군관학교 소개 등 많은 활동을 펼쳤다. 광복회는 1918년 1월 조직이 탄로나 박상진, 채기중, 김한종, 이병호, 장두환, 임세규, 김경태가 사형당하면서 와해되고 말았지만, 만주로 피신한 황상규, 김대지 등 젊은 단원들이 의열단 창단의 노둣돌을 놓음으로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거대한 자취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