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보우(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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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3월 21일 (화) 14: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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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普愚)()
대표명칭 보우(普愚)
영문명칭 Bou
생몰년 1301(충렬왕 27)-1382(우왕 8)
시호 원증(圓證)
태고(太古)
보우(普愚)
탑호 보월승공(寶月昇空)
성씨 홍씨(洪氏)
본관 홍주(洪州)
출신지 홍주(洪州: 현재 충청남도 홍성)
승탑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高陽 太古寺 圓證國師塔)
승탑비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高陽 太古寺 圓證國師塔碑)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Quote-left.png 국사의 휘는 보우(普愚)요 호는 태고(太古)이며 속성은 홍씨(洪氏)이니 충남 홍주(洪州) 출신이다. 아버지의 휘는 연(延)이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해설 1] 상주국(上柱國)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리병부사(判吏兵部事) 홍양공(洪陽公)에 추증(追贈)되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니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다. 부인이 어느 날 밤 태양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대덕(大德) 5년 신축(辛丑) 9월 21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성동(成童)의 나이에도 영오(穎悟)함이 남달리 뛰어났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58쪽.


출가수행

Quote-left.png 13살 때 회암사 광지선사(廣智禪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19살 적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이언만 일귀하처화(一歸何處話)를 들어 참선하였다. ...(중략)... 신사년(辛巳年) 봄에 한양(漢陽)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 주석하게 되었는데, 동봉(東峯)에 자그마한 암자를 짓고는 편액(扁額)을 태고암(太古庵)이라 하고, 그곳에서 영가(永嘉)스님의 증도가(證道歌)를 본받아 태고암가(太古庵歌) 한 편을 지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58-460쪽.


중국으로 유학

Quote-left.png 지정(至正) 병술년(丙戌年)에 스님의 나이 46세 때 원(元)나라 연도(燕都)로 입원유학(入元遊學)하였다. 축원(竺源) 영성선사(永盛禪師)의 고명함을 듣고 남소(南巢)로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입적(入寂)한 후였다. 그리하여 다시 방향을 바꾸어 호주(湖州)에 있는 하무산(霞霧山)으로 가서 석옥(石屋) 청공선사(淸珙禪師)를 친견하고, 자신이 얻은 바를 낱낱이 아뢰고 아울러 태고암가(太古庵歌)를 바쳤더니, 석옥(石屋)이 이를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큰 법기(法器)로 여겼다. 이어 일용사(日用事)를 묻는 데 대하여 스님은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또 여쭙기를 “지금 스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것 이외에 더 일러주실 말씀이 있나이까” 하니, 석옥(石屋)이 이르기를 “노승(老僧)도 이와 같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니라” 하면서 드디어 신표(信表)로서 가사(袈裟)를 전해주고는 이르기를 “노승(老僧)이 이젠 다리를 뻗고 편안히 잠잘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석옥(石屋)은 임제(臨濟)의 18대(代) 법손(法孫)이다. 스님이 그곳에서 보름 쯤 있다가 떠나올 때 주장자(柱杖子)를 주면서 “길 조심하여 잘 가라”고 당부하므로 스님은 주장자를 받고 하직 인사를 하고 다시 연도(燕都)로 돌아오니, 스님의 도덕에 대한 명성이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천자(天子)가 이 소문을 듣고는 영녕사(永寧寺)에서 수법(受法)한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열기를 청하였다. 이 때 원(元)나라 황제 순제(順帝)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불자(拂子)를 하사하였고, 황후(皇后)와 황태자(皇太子)는 향(香)과 폐물을 바쳤으며, 왕공(王公)과 사녀(士女)들도 앞을 다투어 찾아와 예배(禮拜)를 올렸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60-462쪽.


귀국 및 활동

왕사에 임명됨

Quote-left.png 임진년(壬辰年) 여름 현릉(玄陵)께서 스님을 왕도(王都)로 맞이하여 모시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재차 사신을 보내오므로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나아가서 잠시 있다가 그 해 가을 고사(固辭)하고 산으로 돌아갔는데, ... (중략)... 병신년(丙申年) 3월 나라에서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奉恩寺)에서 법회(法會)를 열었는 바, 전국의 선사와 강사가 함께 수없이 모였다. 현릉(玄陵)도 친히 법회에 임석하여 만수가사(滿綉袈裟)와 수정념주(水精念珠)와 기타 복용물(服用物) 등을 헌납하였고,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앉아 종지(宗旨)를 천양하였다. ...(중략)... 4월 24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여 정3품직 장관(長官)을 두어 선문구산(禪門九山)을 일종(一宗)으로 통합하려 하였으니, 스님을 존숭(尊崇)함이 지극함을 보인 것이다. 광명사에 있다가 이듬해에 왕사직(王師職)을 사양하였으나, 왕(王)이 윤허(允許)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스님은 밤을 이용하여 왕성(王城)을 빠져나와 산중으로 은둔하였다. 현릉(玄陵)이 스님의 확고한 뜻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법복(法服)·인장(印章) 등을 모두 스님의 처소로 되돌려 보냈다. 임인년(壬寅年) 가을 양산사(陽山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며, 계묘년(癸卯年) 봄에는 가지사(迦智寺)의 주지를 맡도록 청하므로, 스님은 모두 왕명에 따랐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60-462쪽.


신돈과의 악연

Quote-left.png 병오년(丙午年) 10월에 또 왕사직(王師職)의 사임서를 인장(印章)과 함께 보내면서 깊은 산중에서 임성양진(任性養眞)하도록 허락을 간청하였다. 현릉(玄陵)이 윤허하였으니 이는 간특한 신돈(辛旽)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렸기 때문이었다. ...(중략)... 신돈은 보우가 마치 눈엣가시와 같아 그를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고 백계(百計)를 꾸몄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스님이 강절(江浙) 지방인 해외로 가서 유학코자 하니, 신돈이 현릉(玄陵)에게 고하기를 “태고(太古)는 폐하(陛下)의 총은(寵恩)을 입음이 지극하옵니다. 앞으로 편안하고 조용하게 노기(老期)를 보내는 것이 그가 해야할 도리입니다. 이제 멀리 해외로 유학(遊學)하려 함은 반드시 다른 의도(意圖)가 있어서이니 청하옵건대 폐하(陛下)께서는 통찰하여 주십시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위급하게 느껴져서 현릉(玄陵)은 하는 수 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신돈(辛旽)은 그 일을 형조에 내려 추문(推問)하여 신문토록 하여 스님의 좌우(左右)에 있는 이들을 무복(誣服)케 하고는 스님을 속리사(俗離寺)에 금고(禁錮)시켰다.기유년(己酉年) 3월에 이르러 현릉(玄陵)이 스님을 금고(禁錮)한 것을 후회하고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오도록 청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60-462쪽.


입적

Quote-left.png 신유년(辛酉年) 겨울 양산사(陽山寺)로 옮겨 입원(入院)하는 날에 우왕(禑王)이 다시 국사(國師)로 책봉하였으니, 선군(先君)의 뜻을 따른 것이다. 임술년(壬戌年)여름 소설암(小雪庵)으로 돌아와 그 해 12월 17일 미질(微疾)을 느끼게 되었다. 23일에 이르러 문인(門人)을 불러 앉히고 이르기를 “내일 유시(酉時)에 나는 떠날 것이니 지군(知郡)에게 청하여 국사의 인장(印章)과 구점(口占)으로 남긴 사세장(辭世狀) 수통(數通)등을 봉하여 임금께 전달하라”고 당부하였다. 때가 다가옴에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단정히 앉아 임종게(臨終偈) 사구(四句)를 설하고,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부음을 우왕(禑王)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심히 진도(震悼)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60-462쪽.


주석

용어해설

  1. 이동 고려 문산계(文散階). 중국에서는 위(魏)·진(晉) 시대부터 시작된 관계(官階)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995년에 전의대광(典儀大匡)을 개부의동삼사라고 불렀다. 1298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개칭. 1356년에 다시 개부의동삼사라 하다가 1362년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고쳤다. 출처: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458쪽. 각주 15.

출처